스물일곱, 다시 출발선에 섰다.
나의 직업은 간호작가
스물일곱, 다시 출발선에 섰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나의 달리기는 다른 ‘빠르게 달리기’였다.
내게 주어진 레일은 오직 하나뿐이었고 목표는 1등이었다.
출발선에 선 나는 오로지 도착 지점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나에겐 꿈이 있었다. 문제는 꿈이 너무 많았다. 병원에서 일하고 싶었고, 글쓰기를 하고 싶었으며,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막연하게 간호사와 방송작가를 꿈꿨다. 하지만 그 어떤 꿈에도 확신은 없었다.
[ 대학교 1학년 ]
그렇게 병원에 대한 호기심과 의료인에 대한 동경으로 선택한 간호학과. 하지만 막연하게 선택한 길인 데다 간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던 나에게 이 길을 나아갈 동력 따위는 없었다. ‘다른 선택을 했어야 하나?’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갔다. 정처 없이 방황하던 나의 성적표는 처참했고, 괜한 자격지심으로 힘들었다. 이대로 4년을 보낼 자신이 없었던 나는 결국 1학년도 다 마치지 못하고 휴학을 선택했다.
[ 2년간의 휴학 ]
평소 꿈꿔왔던 다른 길인 방송작가에 도전해보고자 겁도 없이 방송국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맨몸으로 뛰어든 사회는 혹독했고 나는 미숙했다. 눈치도 없고 매일 놓치는 것 투성이에 다음 날이 두려워 잠 못 들기 일쑤였다. 학교 다닐 때와 똑같은 고민에 빠졌다. ‘이 길도 내 길이 아닌가? 도대체 내가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긴 한 걸까?’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학교까지 뛰쳐나와놓고 금방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한편으론 오기도 생겼다. 나도 무언가를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 두 갈래 길 ]
감사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일은 늘었다. 내 몫을 해낼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칭찬도 듣게 되었다. 내가 제작에 참여한 콘텐츠를 보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신기했다. 아직 병아리 작가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런 게 보람인가 싶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잊고 있던 간호사의 길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 무렵부터 내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길은 간호사인가 방송작가인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길은 여러 가지인데 어째서 한 가지 길만을 선택해야 하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모두 할 순 없을까? 발상을 바꾸기로 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 다시 학교로 ]
2년간의 휴학을 마치고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방송작가 일을 병행했다. 한 가지만 하기도 힘든 간호학과, 그리고 방송작가. 이 두 가지를 같이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학교로 퇴근하고 회사로 하교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두 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는 것은 욕심이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나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이 정도 노력은 해볼 만했다. 비록 한 가지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순 없을지라도 좋아하는 일을 통해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 3학년, 병원 실습 ]
고학년이 되어 병원 실습을 시작하면서 간호사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간호사의 업무에 대해서 잘 모를 땐 공부하는 게 마냥 힘들었는데, 실습하면서 시야가 넓어졌고 비로소 간호사의 직업적 가치를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간호사로서 경력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의학적인 콘텐츠를 제작하고 간호사의 인식을 바꿔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명확한 꿈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학점도 급격하게 상승하였다.
[ 그 때, 그리고 지금 ]
꿈이 많아서 힘들었던 20대 초반, 꿈이 많아서 행복한 지금. 그 꿈들을 당장 거머쥘 수 없다고 해서 아쉽지 않다. 30대의 나는 의학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지 않을까? 40대의 나는 간호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쓰고 있지 않을까? 다가올 나의 미래가 궁금해서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게 된다. 이 모든 건 고민의 시간 덕분이다. 누군가는 방황이라고 부를 이 시간이 결과적으로 더 큰 꿈을 꾸게 해 주었다.
[ 새로운 출발 ]
이제 남들보다 길었던 6년의 대학생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대학병원 입사를 앞두고 있다. 아무리 격동의 시간을 견뎌냈어도 새로운 시작은 늘 긴장되기 마련이다. 그래도 단단해진 내면이 있기에 나를 믿는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은 이제 없다. 그저 오랜 시간 풍파에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마음의 집을 지어나갈 것이다. 이 집은 크지도 않고 으리으리하지도 않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가구들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놀러 오며, 내 행복으로 가득 찰 것이다.
스물일곱, 다시 출발선에 섰다.
이제 나의 달리기는 ‘오래 달리기’다.
나는 원하는 레일을 마음껏 달릴 수 있고 목표는 완주다.
출발선에 선 나는 내가 내딛을 한 걸음 한 걸음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