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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Apr 11. 2021

오늘부터 호텔에서 사는 거야.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앞에, 저세상 폭신한 침대, 욕조 딸린 내 방보다 넓은 욕실까지…


호텔 로비도 들어가 본 적도 없던 내가 이런 황홀한 호텔 객실에서 1년을 살게 되었다. 그것도 무료로. 


졸업 후 A 항공 지상직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나는 학창 시절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불만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공항에서 매일같이 해외로 출국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부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나만 빼고 다 외국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시 유행했던 ‘워홀이라도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해외호텔 인턴십’ 모집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인턴십이라니 워홀보다 뭔가 더 있어 보였다. 


그래서 바로 워홀에서 인턴십으로 방향을 돌려 영어권 국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미국, 호주 그리고 싱가포르의 호텔 인턴십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괌이 검색 결과로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미국령이다 보니 미국을 검색하며 같이 따라 올라왔던 것이었다. 호기심에 괌 호텔 모집 공고를 한번 클릭을 해 보았다. 그리고 내 눈을 사로잡았던 여섯 글자! 


‘호. 텔. 숙. 소. 제. 공’


괌에서만 유일하게 호텔에서 인턴들을 위한 무료 숙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기숙사 같은 숙소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인턴십을 다녀온 이들의 후기를 보니 진짜 호텔 객실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미국 본토나 호주에 비해서 시급이 많이 낮다는 점. 그래서 대신 숙소 제공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호텔 숙소 제공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괌이라…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이곳을 막연히 동경한 적이 있다. 부잣집으로 시집간 막내 고모네 집에 놀러 갔다가 이국적인 바닷가를 배경으로 찍은 친척동생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사진 속의 친척동생은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1990년대 초반, 해외여행이 아직 일반화되지도 않은 시기였다. 사진을 가리키며 고모에게 물었다. 


“고모, 여기는 어디예요?”


“아, 거기는 괌이라는 곳이야”


“와, 바다색 너무 이쁘다.”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끝났지만, 어린 마음에 깊은 질투심에 느꼈다. 난 국내선 비행기도 한번 타본 적도 없는데, 친척 동생은 벌써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니… 너무 충격적이었다. 바다색마저 충격적이다. 이때부터였을까, 나도 언젠가 꼭 괌에 가볼 것이라 마음먹으며 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 


그런 괌에서 그것도 럭셔리 호텔에서 살며 일할 수 있다니, 절호의 찬스 같았다. 이때부터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괌 호텔 인턴십에 맞춰졌다. 언제 어디서든 10분이라도 시간만 나면 인턴십과 미국 비자를 위한 인터뷰 연습을 하였다. 아마도 이때가 살면서 가장 열심히 무엇인가에 빠져서 살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약 6개월 만에 꿈에 그리던 괌 인턴십의 최종 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다. 


드디어 괌으로 출국하는 날, 1년 반 동안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공항 가는 길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를 배웅하기 위해 고향에서 올라온 부모님도 함께였다. 공항에 도착하니 한 무리의 친구들도 출국장에서 대기 중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학원, 수영장에서 만난 친구까지 모두 각기 다른 곳에서 만난 이들이지만 나를 배웅한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였기에 어색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신없이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출국장을 넘자 이번에는 A 항공의 전 직장동료 한 무리가 나를 반겼다. 모두들 게이트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패스를 가지고 있어 비행기 문 앞까지 아주 극진한 배웅을 받았다. 


탑승을 하고 배정된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바로 매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문자 폭탄이 와 있었다. 모두에게 다시 한번 문자로 작별 인사를 하고 핸드폰 전원을 껐다. 이때부터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생각들이 한 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인턴십을 가는구나,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면 호텔에서 누가 나와있을까? 혹시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오늘 밤엔 어디서 자는 거지? 아! 맞다, 그전에 또 하나의 고비, 입국심사가 남았다… 혹시 통과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기내식을 먹고 잠도 안 자고 영화도 안 봤는데 걱정 츠나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와 4시간의 비행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입국심사는 질문 2개로 시시하게 끝나버렸고 입국장으로 나가자마자 대문짝만 하게 내 이름이 적힌 웰컴 보드를 발견하였다. 4시간의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호텔에서 보내준 리무진을 타고 20분 정도를 달리니 드디어 앞으로 일하게 될 호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다시 뛰기 시작했다.  


로비에 도착하니 공항으로 마중 나온 직원이 재빠르게 프런트로 가서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프런트 직원은 여권도 신용카드도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객실 키를 건네주었다.   


짐을 들고 객실로 올라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발코니로 향했다. 발코니 문을 활짝 열자 바다 냄새와 따뜻한 공기가 동시에 밀려들어왔다. 어두웠지만 바다가 눈 앞에 있었고 그리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많은 별이 떠있었다. 


‘드디어 괌에 왔구나!’ 


다시 객실 안으로 들어와 객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객실 사진과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보았다. 


‘와아아아아! 이 세상 편안함이 아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헤븐리 베드인가!’ 


폭신한 침대에 누워 객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는데 그제야 책상 위에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봉투 안에 내일의 일정이 들어 있을 수도 있으니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책상 앞으로 갔다. 예상대로 인사과 디렉터로부터 온 웰컴 카드와 앞으로의 일정이 들어 있었다. 웰컴 카드에는 내일 낮 12시에 로비에서 만나자며 짐을 언팩을 하고 푹 쉬라는 것이다. 여기서 내 눈을 사로잡은 한 단어! 바로 언팩 (Unpack)! 


‘언팩이라고, 진짜 짐 풀어도 돼?! 나 진짜 여기서 사는 거야?!’ 


다음날 인사과 디렉터와의 함께 미팅 겸 점심을 먹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저 앞으로 1년 동안 지금 있는 객실에서 지내는 건가요?”


“맞아, 오늘부터 호텔에서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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