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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Apr 11. 2021

호텔에서 먹고 살기 1

주방이 없는 호텔 객실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뭔가 끓이고 지지고 볶고 하는 음식이 정말 미치도록 먹고 싶어 질 때가 있다. 라면 하나만 하더라도 컵라면과 끓여먹는 라면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니 말이다. 


하노이의 호텔 객실에서 오랜만에 컵라면을 먹는데 원하던 맛이 나지가 않았다. ‘생각하고 있던 기대한 맛이 있었는데…’ 젓가락을 그대로 내려놓고 로비로 내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마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가장 싼 전기밥솥을 하나를 골랐다. 생쌀과 끓여먹는 한국 라면도 함께. 전기밥솥이 있고 없음의 차이로 호텔 안에서의 삷의 질이 매우 크게 달라진다. 


노매드 호텔리어로 몇 번의 나라 이사를 겪으며 최대한 짐을 늘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이렇게 실패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까지 먹은 즉석밥 값이 전기밥솥 가격을 넘어선지도 오래. ‘그래! 앞으로 즉석밥은 사 먹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또다시 전기밥솥을 사고 말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지금까지 몇 번의 밥솥을 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1번, 2번, 3번… 그러고 보니 첫 번째 호텔 생활을 했던 괌 호텔에서부터 밥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매니저가 퇴직과 함께 해외 호텔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녀도 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처분하였는데, 그녀로부터 꽤 좋았던 밥솥을 50불에 사게 된 것이다. 


이때 난 이미 인덕션과 냄비 하나를 가지고 있어 라면 정도는 객실에서 살짝 끓여먹었는데, 밥솥을 갖게 되면서 호텔 삶의 신세계가 열렸다. 밥솥 하나만 있으면 웬만한 음식은 다 만들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냄새가 많이 나는 음식은 할 수 있어도 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인덕션 말고 진작에 밥솥을 살걸 그랬나’라는 후회가 밀려올 정도로. 


객실로 돌아와 밥솥 뚜껑을 열어 놓은 채로 물을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가스레인지나 인덕션 정도의 화력은 아니지만 라면 하나는 충분히 끓이고도 남을 열이다. 라면과 수프를 넣고 자글자글 끓고 있는 라면을 보고 있자니 다시 군침이 돌고 식욕이 샘솟았다. 


오랜만에 먹는 끓인 라면의 맛은 정말 비유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정로도 기가 막히는 맛이었다.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김치찌개인지 된장찌개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에겐 오직 외국에서 먹는 한국 라면이다. 다른 나라 라면은 안된다. 꼭 한국 라면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만족도 잠시, 방 안에서 소울푸드를 끓여먹는 호사를 몰래 누렸으면서도 조금 더 맛있게 먹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아… 이 끝없는 인간의 욕심이란!’ 


이때 쯤되면 소울푸드 업그레이드 작업을 실시하여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룸서비스로 생계란을 요청하는 것이다. 보통 호텔 룸서비스 메뉴에는 생계란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생계란을 손에 넣느냐 하면! 나시고렝과 같은 계란 프라이가 들어가는 볶음밥류를 시키면서 계란을 프라이하지 말고 생계란으로 가지고 와달라고 해야 한다. 주문을 받는 직원이 의문을 품고 다시 한번 주문을 확인했다. 그러면 심플하게 대답해주기. 


“예스, 생계란쓰~” 


이렇게 라면에 계란을 풀어서 살짝 업그레이드. 가끔은 한국 마트에서 사 온 떡국용 떡을 넣어 떡라면으로, 즉석 미역국에 라면을 넣어먹으면 요즘엔 상품으로도 판매되고 있는 미역국 라면 맛이 된다. 그러고 보니 난 이미 10년 전부터 미역국 라면을 먹고 있었군! 


그런데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던 이 밥솥이, 사온 지 채 세 달이 되지 않아 전사해 버리고 말았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곤드레나물을 넣어 곤드레밥을 짓다가 말이다. (실화냐!) 레시피에 쓰여 있는 대로 물의 양을 평소보다 많이 넣어서 밥을 짓다가 밥물이 흘러넘쳐 버린 것이다. 밥물 정도야 잘 닦아서 쓰면 될 줄 알았는데 전원이 아예 들어오질 않았다. ‘아… 욕심을 너무 부렸어.’ 그렇게 다시 밥솥 없는 생활로 돌아갔다. 즉석밥과 컵라면을 다시 먹을 때마다 얼마나 속이 쓰리던지… 밥솥을 새로 하나 더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 참았다. 밥솥을 골로 보낸 나에게 스스로 주는 벌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객실에서 열을 가하지 않고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찾아 하나씩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자주 만들어 먹었던 것은 페타 치즈를 넣은 ‘그릭 샐러드’다. 올리브, 토마토, 양파, 오이, 페타 치즈를 넣고 올리브 오일과 소금과 후추를 한꺼번에 지퍼백에 넣어 흔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메뉴이다. 가끔은 객실 안에서 뒹굴어 다니면 포도알 몇 개 따서 반으로 잘라서 함께 넣어주면 조금 더 상큼한 맛이 난다. 와인 안주로도 좋아서 친구가 객실에 놀러 오면 종종 만들어 대접했던 음식이기도 하다. 


방에서 와인 마실 때 또 하나 자주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 있다. 이름은 잘 모르겠다. 마닐라에 살 때 자주 갔던 스패니쉬 바에서 전체요리로 나왔던 건데, 토마토를 강판에 갈아서(꼭 강판에 갈아야 한다, 믹서기에 넣고 돌렸다가는 토마토 주스가 돼버린다) 올리브 오일에 소금과 후추를 넣어서 섞은 후 바게트 빵에 찍먹! 아주 식욕이 폭발한다. 


하지만 밥솥 없는 생활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년에 한 번씩 호텔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연말 파티를 여는데, 경품 추첨으로 밥솥이 생긴 것이다. 호텔이 모든 직원이 경품권을 하나씩 받아 크던 작던 무조건 경품 하나씩은 당첨이 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는 자매 호텔의 숙박권이 경품으로 당첨되었지만, 밥솥을 경품으로 받은 직원을 찾아가 경품을 바꿔달라고 부탁했더니 (사실은 거의 매달림) 흔쾌히 들어준 것이다. 


이렇게 다시 신세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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