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모르포제의 툇마루(BL Metamorphosis)
동성애 반대 서명 부탁합니다!
겨울 찬바람이 더해져 체감온도가 뚝 떨어진 어느 날, 필라테스를 하러 가는 발길이 바빴다. 레깅스에 트레이닝 바지를 겹쳐 입고 패딩에 모자까지 써야 할 만큼 겨울 추위가 호락호락하지 않아 센터 출입문을 열어 얼른 따듯한 훈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 문을 가로막고 서명을 받고 있는 사람이 전혀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게다가 서명하라는 내용도 별로 탐탁지 않았다. 얼결에 나온 말은,
저는 반대하지 않는데요.
뭐라고요?
저는 동성애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추위를 무릅쓰고 서명을 받으러 나선 그가 쏘아보는 눈초리는 엄동설한 그 자체였다. 아니 어쩌면 공포에 가득 찬 눈빛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짧은 몇 초간 다양하게 변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는 뭐라 작은 말로 웅얼거리다 다른 타깃을 찾아 떠났다. 한 번도 서명거절을 받아보지 못한 충격이었을까, 문제적 인간을 발견한 것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었을까? 복잡 미묘했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왜 그렇게 똑 부러지게 확실한 답변을 했을까? 대충 바빠서요, 나중에요 같은 성의 없는 대답으로 스쳐 지나갔어도 됐을 텐데. 동성애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삐사감은 여느 때와 다르게 걸음을 멈추고 서명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 싶었다. 반대를 반대하는 이유는 오히려 훗날 더 단단해졌다.
아이가 중학생일 때부터 시작된 엄마들의 독서회는 긴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었다. 동성애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흔하디 흔한 소재였으니 우리가 읽은 책중에도 몇 번은 등장했으리라. 그럼에도 언젠가 읽은 책에 등장한 동성애 장면은 생소하고도 파격적이었고 많은 궁금증을 낳았다. 주변에 보란 듯이 아웃팅 하는 일이란 좀처럼 없으니 독서회 멤버들은 동성애를 책이나 영화로 배우는 셈이었다.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감과 거부감으로 책 읽기를 중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문학세계에서 활용하는 하나의 요소나 장치로 생각했다.
동성애를 찬성/반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상식조차 없던 때였다. 삐사감에게도 그저 미지의 세계라서 그런 형태의 사랑도 존재할 수 있겠다는 태도를 보였더니 멤버 중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의 말이 마음을 한없이 흔들었다.
그런 허용적인 태도가 아이한테 오히려 안 좋지 않나요? 생각지도 않은 호기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깐 아예 차단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부모의 생각과 행동이 아이에게 흡수되어 영향을 미치고, 그것으로 아이가 동성애를 쉽게 생각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준엄한 경고처럼 들렸다. 그런 일,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러저러한 불행이 닥치면 너라면 어떡하겠냐는 식의 질문을 건넨 사람이 괘씸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토록 유연하고 너그럽고 진보적인 인간인 척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긴 시간의 교육을 통해 동성 간의 사랑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유행을 따라서, 부모가 허용적이라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항력적인 힘의 작용이며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자연스럽게 표출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비난과 수모를 이겨나가는 그들의 사랑이 고되게 느껴졌다. 영원한 사랑, 감정, 마음 따위가 없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이들의 사랑도 언젠가는 식겠지만 소수자의 사랑은 주류보다 조심스럽고 지난하게 보였다.
70대 노인 유키와 10대 학생 우라라가 BL(Boys Love) 만화를 함께 덕질하면서 친해지는 과정을 영화는 그린다. 우연히 접한 만화를 통해 오랜만에 생활의 활기를 되찾은 유키는 다음 회차를 즐겁고 흥분된 마음으로 학수고대한다. 유키를 만화세상으로 친절하게 안내한 우라라는 자신의 꿈을 응원해 주는 든든한 조력자, 유키를 만나 자신감 없이 부유하던 일상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모든 것을 초월한 교감과 우정, 성장, 그리고 BL에 대한 편견 없는 마음. 이 영화를 보며 떠오른 키워드들이다.
나이를 뛰어넘는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누는 매개체가 바로 BL만화다. 영화는 잔잔하고 따듯한 톤으로 BL을 언급한다. 그들의 사랑은 여타의 사랑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듯이, 보통의 연애라는 듯이. 혹여 이런 취향을 공공연히 밝히는 일이 여전히 어느 곳에서든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툇마루가 도시의 아파트 생활자에게는 속절없는 판타지로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취향을 과감하게 아웃팅 하는 모습도 한낱 영화에서 허용되는 판타지였을까? 그렇다 해도 영화 속에서 그들이 아무런 차별과 배제 없이 자신이 생각대로 향유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일본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툇마루는 평화롭고 한가하다. 거기에 모기향과 풍경까지 더해지면 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깊은 안도의 숨이고 심장을 고요하게 만드는 숨이다. 우라라와 유키는 바로 이런 툇마루에 앉아 차와 간식을 나누면서 끝없이 만화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들은 흥분한 어조로 상대의 말에 격하게 동조하기도 하고, 때론 안타까운 마음으로 만화 주인공을 응원하기도 한다. 그곳은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지. 취향과 생각이 거절당하지 않아 안심할 수 있는.
동성애 반대에 반대한다며 서명을 거부하면서도 주위를 의식했던 순간, 지나치게 허용적인 태도가 아이를 소수자로 몰고갈지도 모른다는 지적에 고민했던 순간, 아이의 친구에게 동성애인이 생겼다는 말에 잠시 걱정에 사로잡힌 순간,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말과 생각이 먼저 뛰쳐나갔을 뿐 마음 깊은 곳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영화 속 툇마루와 같은 공간으로 몸도 마음도 피하고 싶었다. 미처 단단히 여물지 못한 어설픈 자신과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씩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깐. 설령 타인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조금 여유로운 마음, 단지 눈앞에 현존하는 사람의 가치와 의지를 인정하는 마음을 장착하고 툇마루에 앉아 차 한잔 나눌 수 있다면 공포와 경멸, 두려움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