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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Nov 18. 2023

시험 보기 좋은 날은 없다

호기롭게 예약한 아침 운동이 점점 힘들어진다. 일찍부터 밥 챙겨 먹일 식구가 없으니 아직 사위가 어둑한 시간에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어져서 점점 기상시간이 늦어지는 요즈음, 아침운동이라도 해서 몸을 움직여야겠다며 운동예약을 한다. 하지만 운동 전날 저녁부터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안 갈 궁리를 한다. 너무 가기 싫다. 예약앱 취소버튼을 노려본다. 그러다 잠이 든다. 따듯한 이불속에서 애벌레처럼 잔뜩 구부린 몸을 겨우 일으켜 운동복을 갈아입고 출근으로 바쁜 사람들과 신호등 앞에 선다. 건널목 앞에까지 나오는데 매번 망설이는 자신이 우습다.


전 시간 운동을 마친 사람과 운동을 앞두고 바쁘게 들어오는 사람들로 좁은 복도가 복잡하다. 센터가 시작하는 시간, 8시 첫 타임 운동을 마친 사람들, 대단한, 존경스러운 사람들. 아는 사람들끼리 스치며 인사를 나누고 강사와 수강생들의 대화로 혼잡한 소음 속에서 용케도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집에 있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쌤 설명회라도 들어보려고 가는 길이야…

삐사감은 리포머에 앉아 몸을 푸는 둥 마는 둥 하는 순간 복도사이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에 귀가 쫑긋해졌다. 자녀가 수능을 봤을 거라고, 아마도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라서 고민이 많은 것이라고 제멋대로 넘겨짚으며 운동에 집중하지 못했다.


어제는 매년 이맘때면 치러지는 수능일이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려 시험 보기 그지 같은 날이었다. 우산 하나를 더 챙겨야 하니 번거로운 데다가 비가 오면 더 춥고 을씨년스럽고 등등. 시험 보기 좋은 이유는 좀처럼 찾기 어렵지만, 시험 보기 좋지 않은 이유는 무수히 많은 법이니깐. 날씨가 춥거나 눈비가 와도, 난방이 너무 과해서 졸리거나 약한 탓에 추위에 긴장이 더해져도, 이웃 자리에 다리 떠는 학생이 있거나 감독관이 신경을 거슬리게 해도… 이유를 들기 시작하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이 시험에 너무 긴 시간과 노력을 다한 사람들은 평소라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어떤 것들에 오감의 날이 바짝 세게 된다.


운동 센터에서 만난 그는 어제 자식의 시험 결과를 들고 어떤 고민에 빠졌을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집안에서 옹송거리는 것보단 바삐 움직이면서 불안과 걱정을 떨치려고 한 것은 아닌지. 집은 편안하고 따듯하며 안전하지만, 때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에 깜깜하고 까마득한 바닥으로 기분이 추락하는 것을 마냥 도와주는 공간이 되기도 하니깐… 이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맘대로 상상하며 한껏 주접스러워진 삐사감은 밤잠 못 이루고 고민에 빠졌던 입시철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지금도 11월 이맘때면 이제는 많이 무뎌진 그날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다. 온갖 불길한 마음과 말을 멀리하고 매번 새로운 희망과 기대로 채우던 미련한 시간들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분별하지 못해 선을 넘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몰두했던 순간은 처음이라 무모하고 무식하게 아이를 괴롭히고 자신도 미워했다.


불이든 물이든 내 자식만 잘 봤으면 했다. 하필 취약한 과목이 어렵게 출제된 것을 원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수능시험 당일에 예정보다 일찍 발표된 입시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안정권이라 믿었던 카드가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긴 시간의 수고를 달래는 저녁 식사자리에서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무지하게 속된 욕망으로 가득한 부모의 진상질로 보였겠지만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었다.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 속상하고 짜증 나는데 거기에 더해 엄청난 책망을 들어야 했다. 아이가 위축되고 실망했을 텐데 어른으로서 의연하지 못하게 눈물을 보였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저녁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그 자체였던, 그날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굴절되고 왜곡된 열망은 남아있다. 서로를 상하게 하는 관심과 욕심이 종종 애정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옛날 옛적, 수능이전에 학력고사는 그야말로 12월 엄동설한에 치렀다. 수학시간에는 난방이 잘 되지 않은 교실에서 언 손을 녹여가며 시험을 보았던 처참한 기억이 있다. 그럭저럭 애매한 성적에 맞춰 치열한 고민 없이 진로를 정하고 학교를 다녔다. 그에 반해 동생은 전기와 후기, 두 번의 낙방을 거쳐서 어렵게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후기까지 떨어지고 버스정류장에서 울고 있는 동생을 발견한 날, 친형제가 나눌만한 정 없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서 저절로 눈물이 났다. 그냥 그 상황이 막막해서 흐른 눈물이었다. 어쩌냐, 이제…


변명을 붙이자면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나 아이의 입시에서 눈물을 터뜨린 것도 같은 종류의 막막함이었다. 전혀 예측하지 않은 결과에 눈자위가 벌게진 아이를 보는 순간 정확히 하나가 되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서로 느끼는 감정은 달랐겠지만  삐사감은 막막함에 눈물이 터졌다. 아이의 눈물을 위로할 수 있는 어른스러움은 고사하고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그것은 정류장에 서서 한껏 외롭고 처량해 보이던,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동생을 바라보던 마음과 같았다.


다른 자원보다도 우수한 인재가 넘치는 이 나라에서는 관문 하나를 넘으면 새로운 스테이지들이 끝없이 열리고 주변을 의식하면서 함께 달리다 보면 쉼이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성실하고 꾸준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실수도 실력이라고 무섭게 무장해야 입시에 성공한다는 매몰찬 현실을 어려서부터 배운다. 대입과 취업, (누군가는) 결혼과 육아라는 관문을 넘어 지루한 일상과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을 향하여 오늘 하루를 더해간다.




구름 없이 맑은 아침 하늘은 갑자기 어둑해지면서 눈비가 내렸다. 첫눈이라고는 하지만 주변이 환해지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솜털 같은 눈이 아닌, 보일락 말락 감질나는 첫눈이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각자의 사연과 사정으로 마음이 요동치는 날이 앞으로도 또 찾아오겠지. 평화롭게, 평안하게, 평온하게, 모든 좋은 기운과 마음을 보태서 무탈하게 모든 관문을 넘어서길 기원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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