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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Nov 28. 2023

전하지 못한 진심

누구도 아빠는 막을 수 없다.

8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노인이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은 타고 내리는 사람이 별로 없는, 쇠기둥 하나만 우뚝 서 있는 모습이다. 정류장 벤치에 열선이 들어있다거나, 냉난방을 갖춘 스마트 쉼터(=버스정류장)가 등장하는 판에 아주 고전적이고 예스러운 멋이 있는 곳이라 하겠다. 어제까지 영상 기온이던 날씨는 급변하여 영하의 쌀쌀한 날씨이지만 오늘은 친구 모임이 있는 날이니 나가봐야 했다. 며칠 전만 같아도 지하에서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갔을 텐데, 생각보다 중고차 매각은 빨리 진행되어 수십 년 만에 동네버스를 타보게 된 것이다. 앱을 보면 버스가 도착할 시각에 맞춰 나가 기다리면 된다지만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건 자식들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었다. 그것도 완전히 익히려면 여러 번. 우선 오늘은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은 일찍 집에서 나섰다. 자가용으로 가면 20분이면 될 거리지만.


자식들은 몇 년 전부터 차 운행을 그만두라고 권유했다. 자동차를 유지하기 위한 보험료, 자동차세, 유류비를 모두 계산해 보면 택시가 아마 덜 들 것이라며, 더 합리적인 소비라며, 카카오택시를 부르면 지하까지 와주고  주차 스트레스도 적다며, 무엇보다 이제 운전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며. 하지만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사실 구식 자동차라 후면카메라나 경고 센서 같은 것이 없어 좁은 공간에서는 아주 능숙하게 주차를 못 한다.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낯선 도시로 훨훨 날아다닐 정도로 운전의 고수도 아니지만, 아픈 친구를 픽업해서 모임에 데리고 가고 시장에서 물건을 잔뜩 사는 날에는 어김없이 출동할 수 있었다. 머릿속 내비게이션이 작동하는 반경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일전에 자동차보험을 갱신했으니, 당분간은 차량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자식들은 이제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말도 없이 한숨지었다. 그런데 주변의 꼬심에도 꿋꿋하게 꺾이지 않던 생각에 균열이 생겼다. 며칠 전 가까운 지역에서 발생한 사고 때문이었다. 80대 노인이 보행신호에도 불구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행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고를 보면서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한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80대 가해자, 노인과 비슷한 연배의 가해자 여생은 어떻게 이어질지 생각만으로도 암담했다.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운전대를 놓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미련하게도 남의 불행 앞에서야 깨달았다.  


몇 년 전 신호대기 중 뒤차를 박는 바람에 운전 인생에 오점이 생겼다. 대기선을 조금 지나온 것이 맘에 걸린 나머지 뒤로 조금 움직인다는 것이 뒤차가 그렇게 가깝게 정차하고 있는 줄 몰랐다. 어처구니없지만 심각한 사고가 아니어서 안도했다. 그래도 충격이 컸는지 오랜만에 보는 자식들을 붙들고 그 얘기를 하고 또 하게 되었다. 자식들은 후방경고 센서가 있었으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며, 작은 사고라서 다행이라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운전을 만류하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경고 센서의 경고음을 들으면서도 멈추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운전하는 누구에게나 내재된 위험이 나이가 들면서 더 커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은 엄마는 다짜고짜 차를 팔기로 했고 딜러가 와서 보기로 예약까지 했다고 말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이라 놀랐지만 반가웠다. 사실 여러 차례 권했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운운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꺼내기도 조심스러웠다. 나이 들면서 포기하거나 체념하게 되는 많은 일 중에 운전, 자유로운 이동도 해당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사고가 결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고.


아빠는 은퇴하고 몇 년간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옛 친구들과도 오래된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80대가 되어 매일 나갈 곳이 있다는 것, 그곳에서 친구와 운동하고 식사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무척 건강하고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지정맥류가 찾아왔고 한동안 앉았다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교자상을 몇 개 붙여 바닥에 상을 차리는 명절이 되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 식사했다. 음식이 손에 잘 닿지 않으니 대충 식사를 끝내버렸다. 모두가 바닥에 앉아있는데 혼자 우뚝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란 불편하고 괴상해 보였다.


병에 익숙해진 것인지 병이 호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바닥에 앉아 같은 눈높이에서 식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좀처럼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의사의 진단을 의심하며 하지정맥 약을 맘대로 중단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호전된 것이다. 이후로 득의양양해진 아빠는 혈압약도 끊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정상혈압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음주를 조금 줄였을 뿐 식습관을 바꾼 것도 아니어서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매일 혈압을 체크하면서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심적인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비결이었을까?


친구 모임에서 한턱을 내기로 되어있다며 집을 나선 아빠는 결국 버스를 타보기로 했단다. 운전을 만류하던 것처럼, 택시 홍보대사처럼 택시의 편리함을 마르고 닳도록 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날씨는 추워지고 길은 미끄러워 버스 승하차가 위험해지는 계절에 차를 매각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를 포기하는 일, 택시를 선택하는 일,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안에서 포용되는 날이 오는가 보다. 자식이든 부모든, 아끼는 친구든, 그 누구에게든 전할 수 있는 진심은 많지 않아 보인다. 전하지 못한 진심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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