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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an 23. 2024

읽는 책, 장식하는 책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100권

이렇게 공부할 교재가 많으니, 마음만 먹으면 뭐든 알아갈 수 있고 너희들은 참 복받은 세대야. 저기 100권만 읽음, 웬만한 책은 다 읽은 거니깐 심심할 때 하나씩 하나씩 꺼내 읽어. 방학 동안 다 읽지 않겠니?

어릴 적 아빠가 자주 하시던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와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100권>, 엄청난 절약가였던 아빠가 아끼지않고 사준 두가지이다.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의 라인업은 대충 이러하다.

1. 곶감과 호랑이

2. 플루타크 영웅전

3. 삼국사기 이야기

4. 삼국유사 이야기

5. 그림 없는 그림책/성냥팔이 소녀

6. 햄릿/리어왕/로미오와 줄리에트/베니스의 상인

7. 사랑의 선물

8. 그리스 신화

9. 쿠오레

10. 마젤란 세계일주 항해기(...)

94. 날으는 교실

95. 피터팬

96. 꿀벌 마야의 모험

97. 대장 불리바

98. 위대한 왕

99. 흰고래 모비딕

100. 마야/잉카제국 탐험기


이렇게 100권을 채워나간 출판사는 모든 것을 한 질 안에 꽉꽉 채워 넣겠다는 의지로 가득해 보인다. 지금 리스트를 살펴봐도 세계 명작에 고전문학까지 두루 다채로워 보인다. 이 책을 보는 순간 부모들은 얼마나 근사한 상상에 빠지겠는가! 100권만 우리 아이가 읽어주면 다방면의 책을 섭렵하게 될 것이라고, 어디 가서 유식하게 한마디 정도 거들 정도는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책장에 책을 꽂아 두었을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다.


어느 방엔가 100권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괜히 순서가 섞이면 안 될 것 같아서 혹시라도 누군가 꺼내 읽고 순서 없이 꽂아두면 반드시 1권부터 나란히 줄을 세워 100번째 책이 끝에 자리 잡도록 열심히 책장을 정리했다.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의 그레이트한 점은 책의 크기가 모두 일정하다는 것. 책 두께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책 높이는 똑같아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란히 책을 진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키가 큰 책부터 작은 책의 순서로 책장을 정리하는 삐사감으로서는 성정에 딱 맞는 책을 만나기는 했다. 그것이 읽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이지만.


초등학교 여름, 겨울 방학만 되면 이 책들을 완독하기를 바라는 독촉과 압박이 있었다. 그 시절 방학 숙제로 내주던 탐구생활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쉽게 후다닥 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빠는 직장에서, 엄마는 집안일로 너무 바빠서 방학 숙제를 도와줄 만한 여유는 없었다. 탐구생활 이외에도 일기 쓰기까지 해내야 하니 항상 시간이 모자라서 개학을 바로 앞두고 모든 것을 해치우기 바빴다.


이런 와중에 책까지 읽기에는 놀거리가 너무 많았다. 동네 친구와 놀다가, 한동네에 모여 살았던 또래 친척과 놀다가, 정 놀 사람이 없으면 언니나 동생과 놀고. 소소한 놀거리와 함께 놀아줄 상대는 너무나도 많았다. 소꿉놀이, 고무줄놀이, 다방구, 그러다 보면 하루가 짧았고 저녁상을 물리고 조금 침착해지면 아빠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하루에 한 권씩만 읽어라....


그래서 집어 드는 책은 항상 제1권 곶감과 호랑이. 고지식했는지 아니면 1권부터 심기일전해서 쭈욱 읽어나가겠다는 다짐이었는지 아빠의 음성이 들려오면 곶감과 호랑이를 꺼내 들었다. 하루 종일 놀다가 밥까지 먹었으니 조금 노곤한데 책을 펼치니 바로 잠이 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제1권 곶감과 호랑이만 조금 낡고 새까맣게 변한 상태로 그레이트북스는 놀랍게도 아주 깨끗한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고 기억한다.


아내가 「고도모노토모」(子供の友達, 어린이의 벗이라는 뜻)를 구독해 그 잡지가 집에 꽤 많았는데, 열심히 읽은 것은 어른이었습니다. 어린이책도 꽤 많이 샀지만 아이들이 펼쳐본 흔적은 별로 없습니 다. 특히 정성껏 갖춰두면 읽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놓아두면 읽는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책으로 가는 문, 미야자키 하야오, 132쪽>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100권을 기억해 내고 리스트를 찾아보다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겉표지까지 검색해 보았다.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약간 반가운 마음에 형제들의 카톡방으로 보내보았더니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책을 열심히 읽었던 추억을 떠올리기보다는 곶감과 호랑이만 읽었다는, 결국 100권을 다 읽지는 못했다는, 아빠가 방학마다 읽으라고 권했다는, 그래도 그중에 몇 권 좋아하는 책도 있었더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던 중 삐사감과 거의 열 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 자기는 놀 상대가 없어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는 새롭고 놀라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지금은 독서와는 거리가 너무 먼 아이라 전혀 완독의 가능성을 짐작하지 못했는데..... 의외의 대답에 놀랐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누나들 사이에서 마땅히 놀 상대를 찾지 못한 아이가 방 한쪽에서 손에 착 들어오는 책들을 읽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곤 바로 어려서는 잘도 읽던 책에서 왜 멀어지게 된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부모가 원하는 물건들(우리 아버지의 경우엔 책과 클래식 음악 같은)을 신경 써서 갖춰둔다고 부모가 꿈꾸던 일이 현실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친구가 없던 우리 집 막내처럼 모종의 결핍이 우연히 책이나 다른 무엇으로 향하게 만들고 그것이 취미나 취향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닐지. 막내에게는 어른이 되면서 그런 우연마저도 힘을 잃은 것 같지만. 당시 우리 자매에겐 종이 인형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와 마이클 잭슨, 마돈나가 훨씬 매력적이었고 아빠는 자주 좌절하셨다. 삐사감도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보다 <독서평설>를 더 많이 읽었고 아빠와 똑같이 실망과 좌절로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가까스로 읽었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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