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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un 20. 2024

(사람을)사다

샤워기는 달았어요

연초에 새로 입주하게 된 집에는 이래저래 손 볼 곳이 많았다. 한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시점이었으니 아직은 난방이 필요한 때였는데 이삿짐을 빼고 들이느라 싸늘해진 방은 좀처럼 따듯해지지 않았다. 겨우 식구들의 온기로 방을 덥히고 두꺼운 이불로 하룻밤을 보냈다. 보일러 조절기를 30도까지 올려보고 방바닥을 계속 만져봐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인터넷 초록창을 열고 검색을 해보니 아마도 구동기 고장일 것이라는 시민들의 진단이 내려졌다.


과연 보일러 구동기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전 세입자는 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살아냈는지 불가사의했다. 더욱이 겨울이라 난방이 필수였을 텐데. 그러고 보니 관리비 명세서의 세목에서 지난달 난방비용은 0원. 집을 비웠나 싶었는데 급탕비는 2만 원이 넘게 나온 걸 보면 그것도 아니고.….별의별 추측이 머릿속에서 난무했다.


구동기 수리로 끝나지 않았다. 보일러를 만져보느라 개수대 하단 싱크대를 열어보니 악취가 심상치 않긴 했다. 개수대에 남아있던 음식 찌꺼기에 이맛살을 자동으로 찌푸렸지만, 그것만 치워내면 괜찮아질 거라 외면했다. 방향제도 가져다 놓아보았다. 그런데 결국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개수대 배관을 손봐야 했다. 과도한 음식 찌꺼기 방치로 배관이 막혔다고.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집 상태를 꼼꼼히 체크해서 임대인에게 샅샅이 알리기 시작했다. 화장실 근처 마룻바닥이 검게 변색한 것, 벽지 여러 곳이 파이고 찢어진 것, 문이 잘 안 닫히고 잠금장치가 고장 난 것 등등. 임대인은 수리에 적극 협조해 주었지만 역시 수리 전문업자를 찾고 시간에 맞춰 집 안에 머물고 수리 후에는 다시 청소해야 하는 과정이 무척 번거로웠다. 미스테리한 전 세입자가 좋은 컨디션의 집을 물려줬으면 좋았을 것을.….


전출입 정산을 위해 이사 당일 중개소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짧은 대화를 나눴던 전 임차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하고 집구석을 그렇게 하고 살았냐는 생각이 말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물론 뒷담화였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저 없이 그의 살림살이를 험담했다. 남이 살아간 모양새를 보면서 자신의 살림도 점검하게 되었다. 녹록지 않은 일이다. 제대로 청결하게 정리하고 산다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거대하고 고풍스럽던 중국의 첫 집도 이와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안 쓰는 방에서 출몰하는 바퀴벌레는 첫날 슈퍼에서 패치를 사서 붙이면서 해결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모두 화장실이 문제였는데 안방에는 샤워기가 없었고 바깥 화장실에 있는 샤워부스에서는 물이 새어 나왔다. 안방은 욕조 부근에 있는 수전 위에 샤워기를 설치하고 샤워부스는 실리콘 작업을 다시 하면 그렇게 복잡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낙관했다. 임대인은 캐나다인지 미국인지 외국으로 나가 있는 상태라서 집 문제는 중개인과 상의해야 했다. 중개인이 중간에 끼어 있어 모든 의사결정에는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어서 집에 큰 문제가 있지 않은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중개인에게 알리고 나서 이삼일이 지나자, 주인님이 흔쾌히 작업을 허락해서 중개인의 소개로 작업자가 방문했다. 일전에 다른 일로 왔던 사람이 신발을 신고 거실 중앙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하얀 거실 타일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 일로 신경이 예민해진 삐사감은 작업자가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脱鞋子(신발 벗어)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문장 앞에 '请(칭)'이라고 단어 하나만 붙이면 공손하게 '~주세요'가 되는 것을 급한 나머지 신발 벗으라는 말만 서너 번 반복한 것 같다. 아마 얼굴도 잔뜩 찡그리고 있었겠지.


작업하러 온 아저씨는 눈이 크고 몸이 작은 사람이었다. 호들갑 떠는 타이타이(太太)를 보고 부직포 덧신을 꺼내더니 신발 위에 착용했다. 현지인이나 다름없이 의사소통이 능통한 중개인이 작업할 내용을 설명하고 돌아갔으나 미심쩍은 나머지 아저씨를 따라가서 미리 외워둔 짧은 단어를 총동원해 다시 한번 전달했다.

여기 실리콘, 물이 새요, 여기는 샤워기 달아줘요


몸에서 헛도는 재킷을 걸친 아저씨는 화장실에 바닥에 털썩 앉더니 샤워부스를 살폈다. 연장도 기구도 별거 없이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어차피 바라보고 있어도 별수가 없을 듯하니 자리를 떴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거의 되어가는데도 큰소리도 없이 아저씨는 꿈쩍도 안 한다. 궁금한 마음에 찾아가 보니 마침 잘 왔다는 듯 오늘내일 굳을 때까지 기다렸다 사용하라는 말을 전하고 안방 화장실로 옮겨 갔다. 안방에서는 그다지 시간을 들이지 않고 금방 작업을 끝냈다.


아저씨는 알아볼 수 없는 한자로 작업 명세와 각각의 비용을 적은 간이 영주증을 건네고 집을 떠났다. 그의 영문을 알 수 없는 작업복 차림을 미덥지 않게 보고, 한국인 작업자들보다 재지 않은 움직임에 불안해했던 마음이 일순 사라지면서 미안해졌다. 인제야 집안의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며 정리된 느낌이 들어 후련했다. 가장 자신 있게 내뱉을 수 있는 말, '시에시에'를 서너 번 반복해서 말하면서 아저씨를 배웅했다.


그가 돌아가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안방 샤워기를 들고 수전을 들어 올렸다. 쏴 하며 쏟아지는 물줄기를 기대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수전을 개폐하는 장치가 어딘가 따로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그럴듯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중개인에게 연락하여 사정을 말해보았다. 몇 분 후 중개인은 상상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샤워기는 달아놓았어요.

샤워기를 달아달라는 요청에 아저씨는 (물은 나오지 않는) 샤워기를 달아놓았단다. 중개인도 당황하는 듯했지만, 어차피 작업자는 배관을 통해 물이 나오게 하는 능력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그저 장식품처럼 부착만 해두었다는 말에 머리가 지끈했다. 다른 작업자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수전에서 샤워기로 연결되는 배수관이 없기 때문에 설치가 불가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결국 우리 가족은 샤워기를 쳐다만 볼 뿐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그 집을 떠나야 했다.


샤워기가 그 지경이니 샤워부스에 기대를 걸어볼까 싶었다. 아저씨가 기다리라고 한 시간보다도 하루 더 지나 물을 흘려보았다. 많지 않은 물에도 샤워부스 주변은 천천히 물이 새어 나오다가 젖기 시작했다. 괜한 덧대기 작업으로 부스 주변은 두터운 실리콘으로 지저분해 보였다. 물이 통하지 않는 멋들어진 샤워기만 욕실에 생겼을 뿐이지만 다른 작업자를 찾아 뭔가 더 적극적으로 도모할 생각은 싹 사라졌다.  


중국은 가끔 이상하고 괴이해서 놀라웠다. 험한 산을 등반할 때도 얇은 끈 몇 개로 겨우 엮은 샌들을 신거나 높은 굽의 신발을 신기도 하고 도로에서 중장비를 들고 작업하는 사람이 구두에 허리띠를 차고 재킷을 입기도 했다. 어쩌면 샤워기를 달아달라고 했으니, 샤워기를 예쁘게 달아놓은 것은 말장난 같지만 제대로 임무를 수행한 셈일지도 모른다.


어느 집단이나 이해 불가한 채로 흘러가기 마련이겠지만, 외국인의 눈으로 다른 집단을 볼 때 더 날카롭고 신랄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샤워기 소동'을 겪는 순간에는 중국인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를 중국인에게 들려줬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삐사감과 같은 반응일지 모르겠다. 중국어학당에서 '샤워기 소동'을 발표했을 때 중국인 선생님은 별로 놀라지 않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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