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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un 13. 2024

(사람을)사다_200위안의 불편함

쓰촨 아이(阿姨)

시원하게 물을 뿌려 목욕탕 청소를 했다. 물로 흥건해진 바닥과 타일 벽, 욕조, 변기의 물기를 제거하다가 새로 산 밀대에 감탄했다. 한번 쓱 밀어내니 물기가 사악 사라지는 게 통쾌하다. 이렇게나 말끔히 물기를 없애주다니, 천 원이던 밀대 값이 이천 원이 되었으니 백 퍼센트 인상되었지만, 이유가 있었다. 그전에 쓰던 밀대가 서너 번의 손길 필요했다면 이건 한 번에 물의 흔적을 없애준다. 접지면이 플라스틱이든 타일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조리 물기를 없애준다. 실리콘 비슷한 재질로 된 밀대 끝부분이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완벽히 밀착되어 매끈하게 남김없이 깎아준다는 전기면도기처럼 바닥에 완벽히 밀착되는 것이 기특해서 오, 오 하면서 감탄을 남발했다.


중국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목욕탕은 건식으로 바뀌었다. 덥고 습한 그곳의 기후에서 화장실마저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은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철이 막바지에 이르는 2월, 설날을 즈음해서 안팎의 기온 차이 때문이지 건물은 온통 습기로 가득 찼다. 아파트 내벽은 물방울이 송송 맺혀있다가 주르르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이러한 환경이 습관을 바꾸게 만들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와주는 아줌마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의 까다로운 조건에 맞는 사람이 다시 찾아와 주었다. 충칭 아이보다도 더 동그랗고 큰 눈을 가진 쓰촨 출신 아줌마였다. 두 번째 만난 아줌마와는 바닥이 보이는 중국어 몇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었다. 그의 중국어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고 신기하게도 어눌하게 내뱉는 삐사감의 말도 그는 찰떡같이 잘 알아들었다.


쓰촨 아이는 중국어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 같았다. 그는 일하는 중간 자투리 시간에 우리 집에 오는 거라 근무조건에 불만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타인이 대신해서 삶의 공간을 쓸고 닦고 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힘들었다. 바깥은 사방에서 분무기로 물기를 뿜어내듯 축축하고 햇볕은 따가운데 아는 친구도 별로 없어서 갈 데도 없으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중국어학당에 등록하면서 쓰촨 아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없어질 물건 중에 가장 값나가는 것은 집주인의 가구인데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아이가 그것을 대범하게 옮기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가끔 집안에서 쌀을 가방에 들고나가던가, 한국화장품이나 귀중품을 빼돌리는 일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 도시의 쌀값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해서 조금씩 가져가도 괜찮을 정도였고 귀중품 같은 것은 원체 집안에 없었으니 맘 놓고 열쇠를 맡기고 학교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면 발을 내딛는 걸음마다 바닥타일은 매끈매끈하고 화장실은 완벽하게 건조된 상태다. 화장지는 호텔식 세모로 접혀있고 세면대와 거울에서도 물기 한 방울 찾기 힘들다. 한국에서 화장실은 항상 물기가 조금씩 남아있는 습식이었는데 이 도시의 축축한 공기 속에서 살다 보니 화장실만큼은 바짝 말라 있는 게 정답이다 싶었다.


가끔 집에 있는 날 쓰촨 아이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전혀 서두르지 않고 우아하고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두 시간도 남아도는 느낌이었다. 겨우 쥐꼬리만큼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어느샌가 맵고 독한 눈초리로 움직임을 쫓으며 청소 상태를 확인하게 되었다. 사람의 노동력을 헐값에 쓰는 것에 익숙해지는 시점이었다.


대도시로 이주해서 값싼 임금을 받고 여러 가지 일을 해내는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농촌 출신이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빈궁한 살림살이를 조금이라도 일으킬 기회를 잡기 위해 먼 곳까지 온 사람들이다. 쓰촨 아이도 자세한 내막을 들은 적은 없지만(알아듣지도 못했겠지만) 남편은 병환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서 아이와 함께 시골에 남아있었다. 쓰촨 아이 혼자 혈혈단신 대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온 것이다. 그들은 설날 귀향하는 일도 없었고 1시간 남짓한 거리는 거의 자전거로 이동했다. 여러 집을 전전하며 일을 하면서 중간에 남는 시간에 손수 싸 온 도시락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쓰촨 아이는 가끔 도시락을 레인지에 데워도 되냐고 했고 그것을 따듯하게 한 후 공원 어딘가에서 먹고 다음 일터로 가는 듯했다.


2~3위안(400원)을 내면 탈 수 있는 공공버스를 타는 대신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돌리고, 밥과 반찬을 그득 담아주는 1위안짜리 길거리 도시락을 먹는 돈도 아꼈다. 그렇게 치열한 삶에도 가끔 강제 멈춤의 순간이 왔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순간에 벌이 눈으로 들어와 병원에 가서 큰돈을 써야 했고 자전거를 도난당해 며칠 동안 우울했고 남편이 죽자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와 있던 어느 날, 중국에 남아 있던 가족은 쓰촨 아이가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병환에 있던 남편이 돌아갔다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니 그동안의 임금을 받기 위해 회사까지 찾아왔었다는 말이었다. 아주 적은 금액이었지만 황망한 소식을 위로하는 위로금도 함께 건넸다는 말을 듣자, 쓰촨 아이가 우리 집의 마지막 아이가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돌아온 중국, 여전히 사계절 무덥고 여전히 집은 버겁게 넓지만 혼자 해보기로 했다. 그전보다 조금은 작은 집으로 이사한 것도 자신감을 북돋웠다.


우리 집 아이(阿姨)는 타이타이(太太). 삐사감은 타이타이 겸 아이가 되기로 했다. 주변의 누구도 가사도우미 없이 살지 않았지만, 못 할 것도 없었다. 쓰지 않는 공간은 철저하게 봉인해서 출입하지 않아 먼지를 막고 신경이 거슬리지 않게 닫아버렸다. 첫 번째 집보다 2/3 정도로 작아진 면적, 화이트 계열의 현대적인 인테리어는 적은 손길에도 쉽게 깨끗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도 건식 화장실은 포기할 수 없었다. 쓰촨 아이가 했던 것처럼 물기를 모두 없애고 호텔식 삼각 화장지를 만들어야 마침내 청소를 끝낼 수 있었다. 그때 다이소 밀대가 있었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

쓰촨 아이의 조금은 휑하니 큰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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