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지붕 B사감 Sep 04. 2023

네 이름은 감자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은 감자다. 강아지는 없는데 이름은 있다. 몇 년 전부터 강아지나 고양이를 입양하는 것에 나를 뺀 나머지 가족이 동의하면서 그들은 종종 상상 놀이를 한다. 새로운 가족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마냥 신나 보인다. 나무님은 어감이 따듯하고 부르기 좋은 이름이라며 곧 감자같이 노르스름하고 동글동글한 강아지와 함께 할 듯이 흥분하는 모습이다. 강아지 이름이 뭐든 사람보다 더 큰 위안이 된다며 선인장님은 유기 동물 보호소 사이트를 찾아 한없이 귀엽거나 처량한 눈빛의 동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다고 동요할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주 그렇게 노닥거리며 저녁을 보낸다.


  그날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마치 같은 동 입주자인 것처럼 강아지가 올라탔다. 쫓아오는 견주도 보이지 않았다. 난 토토로를 처음 만난 사츠키처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곁눈질로 슬금슬금 훔쳐보았다. 어디서 내리려나? 난 이제 곧 내리는데... 강아지는 당당하게 서서 엘리베이터 앞문만 쳐다보고 별 미동이 없었다. 딩동, 7층에 도착했고 난 문 앞으로 다가서서 재빨리 나오는데 문이 닫히기 전에 강아지도 함께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앞집 강아지인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찰나, 강아지도 같이 들어와서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제야 위기를 감지하고 방금 청소한 거실로 강아지가 뛰어 올라가기 전에 문밖으로 몰아내고 문을 쾅 닫았다. 저녁에 돌아온 가족들에게 기이한 일이 있었다며 말을 꺼내자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우리 아파트에는 고양이 삼총사가 산다. 삼순이, 까미, 그리고 사냥이. ‘사냥이’는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비둘기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이들 삼총사의 이름은 부르는 이에 따라 자유롭게 바뀐다. 삼순, 색삼, 깜장, 얼룩 등등. 생김새에 충실한 이름을 가진 이들은 주로 어린이집 화단 부근에 출현하여 몸을 한껏 바닥에 밀착시키고 졸고 있거나, 사람들의 손길을 느끼며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익숙한 인간이 나타나면 등과 궁둥이를 탁탁 치도록 허하지만, 다른 낯선 어설픈 인간이 아는척하면 눈을 살짝 떴다가 감아버린다. ‘어이, 인간아, 그냥 가던 길 가라. 자는데 귀찮게 하지 말고’ 하는 것 같은 고고한 눈빛에 주눅 들어 버린다.


  비 오는 날이면 누군가 이들이 있는 곳에 우산을 펼쳐주고 먹이와 물은 항상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근처 노인정에 있는 어르신들이 보면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고 모든 입주민이 이들을 반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양이 삼총사가 거의 상주 하는 아파트 동 앞에 붙어 있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는 푯말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셋이 가끔은 둘이-사냥이는 아마도 자주 사냥에 나서는지라 안 보이는 일이 많은 것 같다-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갈등 없이 모두의 고양이가 된 듯하다.

 

  나무님과 산책할 때면 항상 이들 고양이 삼총사 서식지를 지나쳐야만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이 길을 지나가는 나무님은 고양이의 안위가 항상 궁금하다. 그날도 고양이들을 만나러 어린이집 앞으로 향했고 삼순이와 까미가 거리를 두고 바닥에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연두색 눈으로 째려보는 듯이 강렬한 눈빛을 발사하던 까미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데 갑자기 삼순이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네 발로 서서 걷는 일을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웬일인가 했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나는 당황해서 “야, 저리 가. 오지 마”라며 소리치면서 뒤로 물러섰다. 시종일관 쌀쌀맞던 고양이가 내게 다가오자 반가워하기는커녕 손사래를 치며 뒤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무님은 의아해했다. 나는 갑자기 인간 손타면 안 된다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동네 아이들이 매일 오가며 조물조물 만져주는 고양이들인데 무슨 망언인가 싶지만, 집안으로 불쑥 들어온 몇 년 전 강아지가 떠오르면서 겁이 덜컥 난 것 같다.


  가족들은 엘리베이터 강아지나 아파트 고양이가 나를 특별히 따르는 것이라며 우리가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것은 운명 같은 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강아지들이 우연히 나를 쫓아오거나 나를 바라보는 일이 많기는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전생이 강아지였나 보라고, 나에게서 개 냄새가 나는가 보라고 신소리를 하며 넘겼다. 하지만 가족은 동물에게 사랑받는 인간이라며 집요하게 입양을 종용한다.


  성인이 된 직후, 등굣길에 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 발뒤꿈치가 조금 까질 정도로 상처를 입었고 그 이후로 조금 이상한 짓을 할 때면 미친개한테 물려서 그렇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어려서는 하퍼라는 어린 강아지를 잠시 키운 적이 있다. 동네개가 새끼를 많이 낳아서 우리 집까지 오게 된 하퍼는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시골 농가로 가게 되었다. 요즘은 파양을 비난받을 행위로 생각하지만, 당시엔 인식이 부족해서 부모님에게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갈등이 없었다. 하퍼소식을 드문드문 들었지만 결국 닭한테 쪼이는 수모를 당하다가 줄을 끊고 도망갔다는 얘기를 끝으로 차차 잊혔다.


  가족이 원하는 반려동물 입양에 내가 그토록 소극적인, 아니 때로는 적대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개에게 물려서 생긴 혐오감이나 두려움 때문일까? 혹은 과거 끝까지 반려하지 못한 죄책감이 남아서일까? 아마도 생명의 시작과 끝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 입양한 하퍼처럼 이름을 붙이고 부르며 귀여워하다가, 잠깐의 슬픈 감정으로 끝내버릴 수는 없다. 반려동물은 아이만큼 귀중한 생명으로 곁에 있을 것이고, 보통은 떠나보내는 일도 인간이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이보다 더 무거운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다.


  난 쉽고 빠르게 결정하는 성격이 아니라 실수가 적지만 시도하는 일이 극히 적다. 그러니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일은 아마 평생 없을지도 모르겠다. 반려동물 산업을 비판적으로 보고 특히 펫숍에서 구매하는 행위를 극도로 반대하지만, 적극적인 활동가는 아니다. 추운 겨울 구조된 고양이를 입양할 정도로 사랑이 가득한 인간도 아니다. 지금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는 것을 조건으로 반려동물 입양을 유예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생명체라도 이름을 불러주고 눈을 마주 보며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나는 엄청난 에너지로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게 ‘시고르자브종’이든 뭐든 내가 ‘아는’ 존재가 되는 순간에 나는 돌변하는 인간이니깐. 가족들은 이런 나를 알면서도 냉정한 B사감 어쩌고 저쩌고라며 험담을 한다.




  한 달 전부터 아파트에는 새로운 아기냥과 엄마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라인을 빡세게 한 어린냥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사람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러가고, 무리 중 가장 검은냥이는 인간이 지어놓은 거처로 재빨리 피신한다. 머리만 처박고 미처 갈무리 못한 꼬리는 바깥에 삐죽 나와 좌우로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어리숙하고 마냥 귀엽다. 누군가 물과 사료, 우천 시 우산까지 공급하며 터죽대감냥이 삼총사처럼 동네냥이로 환대하는 듯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마을처럼 보였는데…


  어제 인사하러 지나가던 길에 냥이의 거처와 우산이 훼손된 것을 발견했다. 처참한 모습으로 파괴되어 경찰이 조사에 나서는 씁쓸한 현장이었다. 다행히 냥이들은 무사했다. 생명을 향해 선의를 베푸는 마음과 그것에 적의를 품는 마음이 충돌했다. 그들 모두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겼는데 한쪽의 행동이 두려움과 공포를 만들었다. 그 안에 있던 냥이가 피해를 입었다면 적의를 품은 행위자는 좋은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냥이라는 생명에게 향했던 무서운 마음이 어떤 생명이라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러자 우리가 좋아하는 밤 산책길이나 조금은 으슥한 골목길이 무서운 장소가 돼버렸다. 그 거리를 만끽하지 못하는 게 억울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들처럼, 남다르게, 뻔뻔하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