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irlis의 독거 에세이 5 ㅡ 칭송으로부터의 탈출
이십 대가 끝나가던 시절, 임용고사의 벽은 너무 높고 학원 수업의 갑갑함은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공부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뭔가 '열정적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던 나는 잠깐 지방 공중파 방송작가를 했었다. 잠깐이라는 단어도 부족한, 당분간에 가까운 시간... 꿈을 좇는 것도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지쳐 이리저리 탈출구를 찾아 기웃거리던 어떤 날, 자소서를 소설처럼 써서 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내게 와 달라고 전화를 했다. 급한 결원이 생겼을 때 집어 들기 좋은 자소서였나 보다
첫 출근 날 아침, 회사 로비를 가로질러 사무실로 걸어가는데 오른쪽 저편에서 키 큰 아나운서가 상사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상을 잘 치렀고... 감사하고... 결근한 내용을 보고 중인 낮고 맑은 목소리를 귓전에 흘리며 넓은 일터에 들어가 상사와 접견하고 내 책상을 배정받고... 업무를 익히고 있는데 아까 그 아나운서가 들어와 읹았다. 그는 내 옆자리였다.
출근 첫날부터 방송원고를 썼고 내가 쓴 원고가 전파를 탔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아나운서가 내 담당 프로 진행자였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이었는데 아침마다 일찍 출근해서 많은 뉴스를 읽고 내가 읽은 책과 날씨, 사회적 이슈들과 접목해서 원고를 썼다. 가끔 유명한 사람들이나 관공서 담당자들과 메일이나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고 질문지를 만들거나 방송 순서를 짰다. 일은 재밌었고 난 일을 잘 했다. 난 매우 순종적이었고 모든 것에 의문이 없었다. 스트레스도 기쁨도 없는 나날, 유난히 더웠던 그 여름, 기억나는 유일한 행복은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 평화의 이유를 안다.
그곳은 내 열정이 아닌 회피의 자리였고 야망이 없어서 절망도 없는 내 젊음의 연옥이었다.
난 '박 선생'에서 '박 작가'가 됐다. 첫 출근한 주에 교회에 갔는데 '취업' 했단 소식 들었다며 축하가 줄을 이었다. 이후 어딜 가도 '박 작가'라는 말이 내 원함과 상관없이 나를 돋보이게 했다.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것을 뼛속까지 느꼈다. 오랜 시간 고생스럽게 학교와 학원에서 전문성을 키워왔던 나는 '전업' 이 아닌 '취업'을 한 사람이었다 국가 공무원이 아닌 선생은 선생이 아니었던 것일까.
사람들의 나에 대한 가치 평가의 기준은 '존재'가 아닌 '장소'에 있음을 그때 알았다
희극이 따로 없었다 전문 교육도 받지 않은 공중파 지방 방송국의 라디오 작가라는 자리에 그토록 경외를 표하는 그들이 솔직히 역겨웠다. 사람들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방송 일은 허드레 일이었다. 방송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루하고 한심했고 그냥 월급쟁이였다. 어떤 노력도 어떤 열정도 없었다. 지방 방송국은 정말 '권태'스러웠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베테랑'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는 늘 어딘가에서 자다가 나타났다. 항상 술에 절어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송은 내가 준비했고 그는 재능과 노하우로 진행했다. 문제 될 것 없었다. 세상을 뒤집어보자고 하는 방송이 아닌 것을 모두가 아니까...
내 사수 격인, 작가 경력이 나보다 긴, 나보다 조금 어린 여자 작가는 나쁜 년이었다. 그냥 내 인생에 나쁜 년은 그리 많지 않은데 내 생각에 걔는 내가 '바보'인 줄 아는 것 같았다. 날 무시하며 본인이 머리가 좋다고 믿으며 언제나 우쭐했다. 첫 점심시간 날 왕따 시켜 기선을 제압하려 했고 내 편인 척하며 내 이용가치를 염탐했고 사무실의 가구 취급하다가 내 일을 가로채고 싶어 안달을 하며 각종 로비를 했고 그걸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시치미를 뗐다.
그 사수는 ㅡ 사실 배운 게 없어서 사수도 아니지만 ㅡ 서울에서 알아주는 스포츠 신문 기자 출신이었다. 아는 연예인도 많고 어쩌고 저쩌고인데 국장이 또 그 경력을 엄청 좋아했다. '기자님'이라며... 늘 대접했다. 그런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즐기는 모습이 재밌기도 했다. 수준 하고는... 지금 생각하면 그래 봤자 서울 생활에서 연애와 직장생활에 실패해서 내려온 마음 약한 여자였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업무에 있어서 난 간단히 밀리는 실력은 아니었다. 내 눈엔 모든 것이 너무 유치했고 텃세에 치이기엔 그간 내 고난의 내공이 너무 단단했다. 단지 내 손에 있는 먹기 싫은 케이크를 눈독 들이는 굶주린 고양이 같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정중히 달라고 했으면 그냥 줬을 텐데... 그냥 내버려 뒀다. 나는 나대지 않아서 적도 없었다. 아마 그녀에게 나는 만나 본 적 없는 독특한 캐릭터였을 것이다. 적도 편도 아닌 사람이 나였다.
방송국에 딱 두 명이 싫지 않았다. 옆자리의 그 키 큰 아나운서, 모두에게 친절했고 지방 아나운서들에게서 가끔 보이는 격에 안 맞는 허세 따윈 없었다. 자리에 거의 없어서 친하진 않았다. 다른 한 명은 지하 라디오 스튜디오의 기사님이었다. 방송 때마다 그분과 같이 기계를 만졌는데 방송국 통틀어 가장 인격적이셨다. 일솜씨가 정확하셨고 가족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아빠가 딸을 대하는 듯 따스하셨다.
내가 그 시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은 직위나 장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결정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늘 다른 곳을 꿈꾸고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서 최선을 다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옮겨갈 용기도 없어서 불평만 하며 갇혀 있었다. 그들은 연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남을 평가했다. 본인이 이상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믿을 수 없어서...
나는 곧 그 일을 그만뒀다. 내가 그만 두기 바로 전 주에 옆자리의 아나운서는 서울 모 방송국 서류 전형에 합격했고 3명 중 한 명이 붙는 합숙 면접에 가야 해서 직장을 그만뒀다. 그는 그쪽을 선택했다. 미래가 불투명함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내 원고를 받아 읽기만 하던 파트너 아나운서님은 내 갑작스러운 사직의사에 무척 당황하며 갖가지 조건을 내세우며 붙들려했다. 난 가뿐히 그 사수 작가를 조커로 내밀었다. 둘은 참 잘 어울렸다 사수는 내 먹기 싫은 케이크를 탐욕스럽게 움켜쥐었다. 난 쉽게 빠져나왔다.
난, 내가 만날 제자들과 내가 창조할 수업들을 꿈꾸며 다시 공부를 했고 이런저런 상황을 거쳐 그다음 해에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계획에 없던 독거인의 삶을 살게 됐다. 어느 저녁 TV를 보는데 그 아나운서가 나왔다.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합격했구나... 지금 그는 매우 잘 나가고 있다. 우린 각자 불확실한 길을 선택했다. 2년쯤 후 춘천에 내려갔다가 어느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어떤 여자가 뒤쪽에서 너무 열정적으로 논리적인 가면을 쓴 험담을 해대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쳐다보니 그 사수 작가였다. 임신한 상태였고 방송국 근무시간대였다. 이제 일을 안 하는 것 같았다.
난 지금 매우 인격적인 오너를 모시고 있고 사랑한다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내 방식대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가끔 강사와 스탭들의 방식이 달라서 불편하긴 해도 인격이 의심되는 사람은 없다. 이곳을 찾는 데까지 오래 걸렸다.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계속해서 찾아다녔고 힘든 시간이 있었다. 이곳이 나는 좋다. 그래도 매일 생각한다. 여기가 종착지는 아닐 거라고, 안주하고 편해지는 순간 내 젊음은 끝장이라고, 애들이 경멸하는 지루한 어른이 되지 말자고...
직장은 삶의 수단일 뿐 삶의 방식을 대변해 주진 못한다.
연옥에서 사느니 지옥이든 천국이든 선택하는 것이 옳다. 내공이 있으면 천국이 될 것이고 아니다 싶으면 탈출하면 된다. 나에게는 안 힘들려는 태도가 가장 힘든 방식이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던 그 당분간의 시절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시간은 아니었다. 때로 강제 종료가 필요하다.
내가 뭘 하는지 누구와 사는지 칭찬해 주는 사람의 입이 절대 내 월급이 돼 주지 않고 내 외로움을 덜어 주지 않는다. 신경 쓸 필요 없다. 맘이 편하다고 삶이 쉽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도 내가 선택한 삶으로 나를 채워가며 끊임없이 시작과 안정과 유지와 중단을 반복해야 한다. 나 역시, 경멸해 마지않던 그 지루한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겠다.
모두가 맛있다고 인정한 케이크라 해도 내가 맛없으면 안 먹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