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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만난 여자

혼자여행기 1804제주도 1

by 호담

혼자여행

2018년 4월 11일 . 왕복 비행기 표와 첫날 숙소만 정한 채 1주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떠나왔다. 이번 제주 여행은 지난 2016년 여행 이후 첫 국내 여행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시도해 본 지 5년 됐다. 나의 첫 혼자여행지는 필리핀이었는데 그때는 아는 분이 필리핀에 살았기 때문에 맘편히 떠났던 것이고 완전한 무연고의 여행지는 4년 전의 제주도가 처음이었다. 도시의 삶과 단체 여행에 익숙했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제주 시골마을에 왔다가 첫 날은 종일 굶었었다.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굶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실감해봤던 그날의 배고팠던 저녁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따라 노을이 참 아름다웠었다. 이번에는 데워먹는 황태 해장국과 즉석밥, 도시락용 김, 초콜렛을 넣은 파우치를 소중히 챙긴 가방을 들고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숙소 가는 길에 있는 신촌향사


여자들만의 숙소

시간은 오후 4시 50분. 365번 버스를 타고 제주도 조천읍 신촌리로 출발했다. 첫 숙소는 신촌 조용한 해변에 자리잡은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 '여자마니 게스트 하우스'. 가정집을 게스트 하우스로 꾸민 이곳은 깔끔하고 우아한 정원과 나무데크로 꾸민 테라스, 넓은 거실, 4인용과 3인용 도미토리룸, 더블룸을 갖추고 있다.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 하우스인데도 욕실이 상당히 넓고 샤워실과 화장실이 각각 두 개씩 있어서 욕실 사용과 화장실 사용 대기 때문에 불편할 일이 없다. 심지어 상당히 밝고 하얗고 쾌적하다. 집안 구석구석의 관리 상태와 소품 하나하나에서 사장님의 꼼꼼함과 청결함과 기품 있는 안목이 느껴진다.

여자마니 게스트하우스 예약하는 곳


처음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거실에는 단정하고 차분한 느낌의 사장님과 밝은 성격의 중년 여성 두 분이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난 바로 도미토리 룸에 짐을 내리고 같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난 프리랜서라 평소에 이렇다 할 규칙적인 시간표가 없다. 늘 새로운 상황에 대비해야 하고 미리미리 생각해 두고 바로바로 결정해야 한다. 퇴근도 쉬는 날도 없다. 여행 오기 전에 계획을 안 세우는 이유는 사실 여행 계획을 하며 여행을 할 만한 물리적 정신적 여유가 없는 이유가 크다. 11일에 출발하기 전날 밤 11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 짐도 안 싼 상태라 새벽까지 짐싸고 살림살이 정돈하고 냉장고의 남은 음식 억지로 처리하다가 지쳐서 '내가 왜 비행기표는 끊어서 이 고생인고...'라는 생각을 했었다. 오후 비행기가 아니었으면 정말 떠나오기 싫었을 것 같다. 하필 그날 날씨는 왜 이렇게 좋고 가로등 불빛에 비친 창밖의 만발한 벚꽃은 왜 그리 예쁘던지... 그리고 제주도 일기 예보도 안 좋았다. 그러한 이유로 난 일주일 내내 계획이 아무 것도 없었고 숙소 근처에 식당이 있다는 정보만 간신히 얻었기 때문에 맘편히 (포부가 낮으면 마음이 편하다) 무계획의 첫 날을 즐길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잠자리만 안전하면 여행의 반은 성공 아닌가?

게스트하우스 마당과 인근 지도

테이블 맞은 편에 앉은 두 분은 부산에서 오셨고 3인용 도미토리룸에 묵고 있었다. 차를 아주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마시는 분들이었고 옷차림과 대화 스타일로 보아 전문적인 문화 콘텐츠쪽 일을 하시는 느낌이 났다. 멘토와 멘티 관계 같은데 멘토쪽인 분은 적당한 친밀함과 적당한 거리두기가 능숙하게 느껴졌다. 4인실 도미토리에 머무시는 분은 자고 있었다. 3시부터 내내 취침 중이라는 걸로 보아 어지간히 올빼미이신가 보다 싶었다. 사장님 포함 우리 네 명은 담소를 나누면서 제주 내 여행정보와 숙소 인근의 산책 코스와 맛집 정보를 주고 받았다.

예전 하루e수다 자리에 있는 아큰식당 제대로 된 고급 파스타를 제공하며 상당히 친절한 주인 내외분.


숙소에서 1분 거리에 위치한 전문 파스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저녁 시간을 보냈다. 사장님은 조식 준비를 하며 부엌정리 중이고 돔 룸메이트는 깨어나 분주히 이곳저곳 청소 중이고 3인실의 두 분은 드라마 시청. 나는 이어진 공간의 벽쪽 소파에 길게 누워 다음 일정들을 좀 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드라마가 끝날 때 쯤 4인실의 다른 게스트가 돌아왔다. 다들 각자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며 앉고 싶은 곳 원하는 포즈로 앉아 대화를 나눴다.

여자들만의 게스트 하우스가 이렇게 편안한 지 몰랐다. 모든 물건은 수시로 제자리를 찾고 물을 쓰는 모든 곳은 그때그때 물기가 제거되고 자연스럽게 소소한 물건이나 음식이 공유됐다. 누군가는 이곳에 일터가 있어서 수시로 제주를 오가고 있고 누군가는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느라 한 달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고 누군가는 타인의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여행 또는 딸의 여행을 계획한다. 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서로를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거실의 밤풍경이었다.

지난 겨울 제주도에서 혼자 여행 중이었던 여성이 제주 숙소 대리 관리자였던 육지 남성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후 여성 전용 숙소들이 여름까지 예약이 꽉꽉 차고 기존 숙소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오고갔다. 애꿎은 사람이 피해를 많이 봤다. 안타까운 일이다. 제주에는 이벤트 파티가 특징인 숙소도 많다. 지금의 나에겐 이정도의 숙소가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후반에는 또 다른 곳들로 옮기겠지만 지금은 서로의 거리를 지켜주는 적당한 친밀함이 더 편안하다. 2층 침대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삐걱거림이나 화장실을 드나드는 문소리조차 조심하는 조용함 속에서 잠을 청했다. 안타깝게도 잠이 잘 안 오긴 했지만...


숙소 근처 밤산책


둘째날 아침

나는 새벽 4시 반이 넘어 잠이 들었었다. 8시 30분에 눈을 떴다. 다행히 별로 피곤하지 않다. 어제 그 올빼미 멤버만 제외하고 모두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하루 계획을 나누고 서로의 여행에 안녕을 기원했다. 오늘 체크아웃인 어제 늦게 들어온 게스트는 15년 동안 페션쪽 일을 하셨고 20년째 반 영구 화장 일을 해 오셨다고 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나에게 눈썹 안 그려도 되고 립만 발라도 되겠다고 하신다. 밑화장 하고나면 면봉으로 눈썹쪽에 뭍은 화장을 지우면 된다고...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 싶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여행지로 출발. 오늘 나의 일정은 조천리 방문 후 세화 해변 다녀오기.

올레길 18코스로 십여분 걸어 조천리 도착. 가는길에 대섬을 지나는 코스. 드물게도 해안도로가 없는 아기자기한 바닷길~

올레길 18코스를 따라 걸어걸어 십여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주와 서울을 고가시는 오랜 페친을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나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비우신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됐는데 원래 그렇게 남 위하는 사람 아니라면서 안심을 시켜주신다. 원래 제주에서 책방 같은 모임 공간을 운영하시다가 다시 개인 공간으로 돌리신 분인데 서울의 생활 방식과 인생관의 변화, 관계와 일, 교육문제 등등에 대해 커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향의 아담하고 이쁜 건물 테라스를 통해 밝은 햇살과 바람이 들었다. 오늘은 날이 참 좋다. 이런 날이 왔다 싶으면 바로 모든 일정은 야외 활동으로 돌려야 한다. 제주도의 4월은 그만큼 변덕스럽다.

같은 건물 1층에 '리하의 커리'라는 딱 내 취향의 인도식 커리 음식점이 있었다. 내부는 복층이고 소품과 식기 하나하나에 음식 맛. 실내 가득한 쾌적한 풍광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페친의 강력 추천으로 바람 살살 부는 2층 창가 자리에 앉아서 배부르게 시금치 치즈 커리와 왕새우 커리를 먹고 조천리 일대를 돌아돌아 산책했다.


올래길의 묘미가 이런 거겠지. 그냥 보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길따라 들어가면 새로운 집이 있고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조천읍이 굉장히 큰데 여기 조천리는 무려 읍사무소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내가 돌아다니다가 여기 가게는 없냐고 물어봤더니 아니 무슨 소리냐고 여기는 읍사무소도 있는 곳이라고 하시는데 그게 얼마나 많은 것을 설명하는 지 알기에 인정되면서 동시에 재밌었다.


산책 중에 만난 붙임성 좋은 강아지 두 번째 만났을 땐 잃어버린 주인 만난 듯 달려옴


조천리의 오후

이장님이 사장이라는 수산 가공 공장? 창고? 를 돌며 여름에 가끔 마을 잔치가 펼쳐지는 풍경을 전해 듣고서 바닷가에 모여 앉아 술잔을 나누며 한치잡이 배의 불빛이 황홀할 여름밤이 상상되면서 여름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천리는 조선시대 때 주요 포구였다. 서울에서 목사들이 들어올 때 이쪽으로 들어왔고 무역 품이나 공물이 드나들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포구에 북연정이란 이름의 옛 건물이 있었다. 임금님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가사를 짓던. 사람이 정철만은 아니었겠지. 그나마 정철은 강원도였지. 여기 제주로 좌천된 목사들은 정말 그 연모함을 표방한 복권 의지가 대단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여긴 항일 기념비도 있고 망루 역할을 한 언덕도 있다. 3.1 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벽화도 있다. 무역이 성행했고 그로인해 부자도 많았을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잣집 자제분들은 유학생활을 하며 사회주의를 배워 만만하지 않은 분위기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페친분의 의견. 상당히 동의하는 바. 인문학 독서가 무슨 세상에서 성공하는 지금길을 만들어주는 줄 알고 자녀에게 인문 독서 지도를 요청하는 분들이 가끔 있었는데 사실 인문학적 글읽기를 제대로 배운다면 성공지향 적인 스피드 게임에 회의를 가질 확률이 높다. 지방 토호들이 많았던 이곳에서 항일 투쟁의 자부심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재밌었다. 인문학으로 성공 스팩을 삼으려는 사람이 인문학 공부할 여건 속에 사는 아이러니처럼...

개인 작업 공간이자 오픈 겔러리


북촌리 할머니

조천리를 구석구석 도는 산책을 마치고 나니 벌써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세화 해변에 가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확인하고 페친과 헤어졌다. 201번버스가 여기 선다고 가르쳐주신 할머니와 나 이렇게 둘이 버스를 기다렸다. 다음은 할머니와 나의 대화. 매우 유창한 네이티브 제주어 스피커와의 대화라 번역체로 기록한다. 할머니는 정말 유창하게 제주 방언으로 말씀하셨다. 당황스럽도록 예측 불가한 제주방언의 어미변화여... 불쌍하게 흔들리는 나의 눈동자...


너무나 애정이 넘치셨던 북촌리 할머니
할머니 : 제주도에는 혼자 왔니?
나 : 네
할머니 : 아니 왜 혼자 다녀. 위험하게.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긴 하지만 나쁜 사람도 많아요. 조심해서 다녀야지. 친구랑 다녀야지.
나 : 네 조심해서 다닐게요
할머니 : 근데 남자친구는 없어?
나 : 네.
할머니 : ... 남자 소개해 줄까(말씀하시고 멋쩍어 하시며 웃으심)
나: (몹시 당황 했다가 깔깔 웃으며 화제 전환) 저 월정리 갔다가 세화 가려고 하는데 그럼 어디서 내리는 게 좋을까요?
할머니 : 세화는 지금 월정리 갔다가 가면 너무 늦어. 어두워지는데
나 : 아 그런가요? 그럼 월정리만 갈까요.
할머니 : 김녕에서 내려서 거기서 걸어 올라가면 돼.
나: 네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어디까지 가세요?
할머니 : 난 이제 집에 가야지. 북촌리 가.
나: 아. 저 내일 북촌가요.
할머니 : 그래? 아니 내가 밥을 해 줘야 하는데 내일 일하러 가야 해서 밥을 해 줄수가 없네.
나 : (엄청 감동 받음) 아니예요. 감사합니다.
할머니 : 어디서 자니?
나: 저 신촌이요.
할머니 : 여기 친구가 있으면 돈 안 내고 여행 다닐 수 있는데... 내가 일을 나가니까..
나: 괜찮아요. 할머니는 혼자 사세요?
할머니 : 가족들이랑 같이 살지. 우리 동네 오면 놀러 와도 되는데...


그동안 제주도 다니면서 제주도 할머니랑 이렇게 길게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엄청 친절하시고 정이 넘치셨다. 버스에서 나란히 앉아서 갔는데 여기가 함덕이고 세화 가려면 얼만큼 가면 되고 이러시면서 여행 경로를 설명해 주셨다. 먼저 내리시면서 나 이동네 사는데 이쪽으로 들어오면 되니까 나 만나러 꼭 오라고 신신당부 하시며 내리셨다. 근처에 앉으신 할머니들 다 나 쳐다보심. 아쉬웠던 짧은 만남이었다.



한적한 바닷가 카페 2층

월정리에 내려 시골길을 가로질러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 근처의 카페와 숙소.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내 스타일은 아닌... 딱 인기 있는 관광지 느낌. 나에겐 함덕이나 북촌리 신촌리의 조용한 바다가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 2층에 자리잡고 꼬박 하루의 여행기를 정리할 작정을 하고 세팅을 했다. 그런데 블루투스 키보드를 열어보니 베터리가 다 됐다. 지난 번에 사용하고 안 껐나보다. 여행기 정리하고 밀린 글 쓰려고 바닷가 카페에 왔는데 낭패다...

가방안에 챙겨온 도리스 레싱의 소설집 <런던 스캐치>를 펼쳤다.'진실의 대가'라는 작품을 읽었다. 역시 도리스 레싱의 작품은 쉽게 읽히면서 오래 생각하게 한다. 멋있는 여성이다.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글이 써지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 것일까.

5시 30분쯤 자리를 떴다.버스를 놓치면 너무 오래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운좋게 바로 다시 201번 버스를 탔다. 어제 잠이 충분치 못했던 몸상태 , 낮의 긴긴 산책, 하루가 끝나간다는 느낌,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탄 안도감이 섞이니 잠이 왔다. 신촌리에서 내려서 동네 골목을 조금 돌아보다가 어제 못 들른 바닷가 구름다리에 가봤다. 그리고 상상도 못했던 일몰 뷰포인트를 발견했다. 종일 여기에 있었어도 좋았겠다 싶다. 한 달 반 전에 캄보디아에서 보았던 일몰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혼자서 보는 쓸쓸하지만 만족스러운 기분 때문일까. 정말 아름답고 조용한 동네다. 잔잔한 물결소리를 들으며 숙소에 돌아와 다음날 여행 준비를 했다.


오길 잘했다. 제주도,

어른들의 비밀동화방 가기




북클럽 '오후 세 시의 여우' 호스트이고 강의와 글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소개된 업체들과 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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