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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잠깐 살아보기

160708 혼자 여행기-3 말레이시아

by 호담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해외에서 다시 국외로 다녀온 여행이 준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새벽에 깊은 잠에 빠졌다. 간밤엔 나의 한계를 어디까지로 둘 것이냐에 대해 고민했었다. 풀기 힘든 숙제를 안고 골똘함을 미뤄둔 채 거실로 나가보니 Sophee 님이 날 위해 아침을 차려두셨다. (전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순간순간, 눈길이 가는 곳곳마다 Sophee 님의 일상을 가꾸는 솜씨에 감탄한다. 어마어마하게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살림을 할 수가 있고 어떻게 이렇게 깔끔할 수가 있을까. 6년째 살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한국의 내 공간을 떠올리며 단 2년의 계약 기간도 영구 주택처럼 관리하는 거주 자세에 감탄했다. 식사를 반쯤 마쳤을 때 키가 183인, 2.5리터 물통을 들고 다니는 쉔이 까치집을 하고 방에서 나왔다. 달그락달그락 누들요리를 만들어 와선 같이 식사했다. 단 한 명의 희생도 당연시되지 않는, 평화롭고 다정한 아침.

거리 음식을 사 먹었다. 일종의 어묵 튀김인데 담백하고 맛있다. 비위가 매우 약한 나인데 여기선 가는 곳마다 다 입에 낫는다. 마켓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길도 활기차고 영국식 건물들의 외관이 이슬람 문화권의 문양이나 구조물들과 어우러져 있다. 워낙 인종이 다양한 데다가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고 이곳엔 서구에서 온 관광객도 많아서 상당히 이국적이다.


코코넛 주스를 한통하고 거나한(?) 기분에 들떠 마켓에 들어섰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어떤 가게의 쇼윈도에서 예전에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다가 한 짝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 구리 공예 귀걸이를 발견했다. 홀린 듯이 들어갔는데 점원 외모가 업도적으로 잘 생겼다. 남자들 외모에 무덤덤한 나조차도 순간순간 쏘아대는 눈빛에 마음이 마시멜로우가 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귀걸이는 왜 이렇게 예쁜지... 하나에 45 링깃, 약 만 원 좀 넘는 가격인데 2개에 60 해달라며 나도 만만치 않은 눈빛 공격을 시도했다.


저쪽 눈빛이 말하길
'너 그거 알아? 이거 합하면 90이야. 내가 80에 줄게. '
나도 다시 장화 신은 고양이 눈으로 말하길
'80은 어떻겠니?'
귀여운 입꼬리까지 장착한 미남 점원이 살인 미소를 날리며
'그래 알았어.'
이렇게 우린 어차피 80에 성사됐을 거래를 쓸데없이 추파를 주고받으며 마무리했다.
'너 나랑 사진 한 장 찍어 줄 수 있어?'
'아~ 나의 기쁨이지. 이리 와서 여기 서봐.'

이렇게 나는 순진하게 포토존에 들어섰다가 덥석 그 녀석의 품에 포획 돼버린 것이었다. 가벼운 어깨 터치 정도가 최대 허용치였는데 0.5초 만에 그 커다란 상체가 사방을 둘러쌌고 작은 얼굴은 내 얼굴왼쪽에 나란히 놓였다. 언제 휘감았는지 난 두 팔을 꼼짝도 할 수 없이 붙들렸고 왼쪽 볼이라도 살려 보겠다고 고개만 처량하게 기울여 피사의 사탑 모양이 되어 얼굴이 자두처럼 빨개졌다. 내가 너무 당황하니까 적당한 자세로 바꿔준 이 청년은 인도 출신. 영어도 상당히 잘한다. 열정 있는 놈...


내가 멋진 사진을 찍어서 네가 나를 그리워하게 해 줄게. 너처럼 예쁜 아가씨가 아내가 어쩌고 저쩌고~~~(안 들림)


정말 대단한 인도의 페로몬 발사였다. 이후 한 시간은 심장이 요동을 쳐대서 혼났다. 아... 너무 오래 데이트를 안 하고 살았나 보다.



예쁜 계단에서 두 여인이 엽서를 쓰고 있어서 살짝 앉아서 나도 찍으려고 앉았더니 두 분이 피해 주려고 했다. 혹시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그냥 자연스럽게 앉아계시라고 했더니 물론이라면서 매우 긴장되게 허공 응시 포즈를 취하는데 진짜 정말 귀여웠다.


어디서 왔어?
난 남한에서 왔어. 너는?
난 남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오! Sophee 가 아프리카에서 살고 싶어 하는데~
(Sophee ) 너 아프리카에서 왔어? 오 근데 너는 유럽인처럼 생겼어. 난 아프리카가 너무 좋아. 그런데 네가 남아프리카 출신이라니. 너의 고향은 어떠니?
정말 정말 아름다워. 꼭 와봐.
응 페이스북 통해서 연락할게
(나) 넌 학생이니?
아니 나 영어 선생님이야. 정말? 난 한국어 선생님이야. 반갑다. 일한 지 오래됐어?
아니 여기서 일한 지 2년 됐어.

그녀의 이름은 Naailah Rochee 히잡 쓴 여인은 그녀의 말레이시아 친구인데 엄마처럼 보살폈나 보다. 나일라의 엄마에게 엽서를 쓰고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그랬듯 봉사활동처럼 영어 교사로 일하다가 이제 고향에 가는 것 같다. 세상에 고정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옆에 있는 차이나 타운에서 문양이 이쁘고 매우 시원한 반바지 발견!

얼마예요?
35링깃
15에 주세요.
몇 개 줄까?

뭐지 이 간단한 비약은... 아무튼 난 약 5천 원 남짓의 가격에 반바지 득템!! 차이나 타운을 빠져나오니 쏟아지는 무더위 때문인지 급격히 체력이 떨어진 느낌이 들어서 근처 스타벅스로 이동했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 소나기가 지나갔다. 엄청나게 센 빗줄기에 나 혼자 신나서 동영상 찍으려고 돌아다니는데 밖으로 나가는 문 옆의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셨다. 비가 오니까 기분이 더더 좋아졌다.


너무나 눈에 밟히던 목걸이 결국 구입. 후회는 없다.

너의 얘기를 들으면서
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

Sophee 님은 나에게 이 말을 정말 많이 했다. 나에겐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지난 5년간의 행보, 특히 변화가 많았던 지난 2015년과 2016년, 그중 최근 3주간...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고 그것에 내 인생을 담아 오랜 시간을 노력해 왔다면 그것을 떠나 다른 인생을 선택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자신을 삭제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옮겨간다는 것은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다.


어느 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견고한 세상에 균열이 생기고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으며 안정감보다 스트레스가 많아도 불편함에 익숙해진 자아는 판을 바꿀 생각을 좀처럼 안 한다. 디디고 있는 땅을 바꾸는 것은 그렇게 힘든 것이다.


그래서 버티고 버티면서 이쪽 세계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괜찮아질 거란 말만 반복하다가 어느 날 깨닫는다. 이제 그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의보단 타의로 판이 바뀌는 이유는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면 도저히 움직일 생각을 못하는 것이 평범한 나라는 사람의 수준이다. 하지만 생각해 본다.

버티는 에너지와 새로 시작하는 에너지 어떤 쪽이 더 클까.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 더 힘을 얻는 걸까.

평생을 안정적인 직장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오늘도 어제와 같이 무사하고 안녕하길,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살고 싶었다. 그런 안정감을 기반으로 뭔가 비전 있고 열정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안정적 삶이 주는 물리적 윤택함을 누군가에게 기꺼이 베풀며 살고 싶었다. 이제는 이것이 얼마나 교만하고 모순적이고 시혜적 사고인지 안다.


아무 난관도 고난도 없는 삶을 꿈꾸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니... 그런 삶은 타인은커녕 스스로에게조차 영감을 주지 못한다. 영원한 낙원은 필경 거주자를 잠식한다. 다른 곳을 바라볼 에너지를 온통 현상 유지에 쏟아붓겠지... 나에게 전혀 움직일 필요가 없는 안정된 삶이 있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다른 세상으로 건너감으로써 이전 세상에 살던 나를 다시 볼 수 있고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원래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힘들어서 어떤 다른 일은 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학대해야 할까. 정말 중요한 일이 있는데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심장이 뛰는 일을 하는 것을 덧없다 말해야 할까.

내가 그렇게 한심한 사람인가. 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인가. 책임의 영역은 누가 정했는가.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결정한 적이 있기는 한가.

"회피와 집중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난 미드시리즈를 몇십 편씩 보면서 공부를 하고 시를 연구하면서 정서를 순화해요. 아무 일 안 하고 멍하게 있는 것이 내 일과 무관하지 않아요. 분리하는 사고 자체가 오히려 우리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지 않나요.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고 나와 관계없는 일이 무엇이죠. 난 이제 특정한 시간 특정한 행위 특정한 이슈에만 메몰 되어 날 제한하는 삶이 싫어졌어요. 정말로 100퍼센트 자기 결정을 하며 존엄을 획득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어요."

말하는 동안 내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나를 설득한다. 난 저쪽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죽을 때까지 난 끝없이 변하는 상황들을 만나겠지. 그리고 선택한 후엔 당황하지 않으리라. 예상 못한 일이 아니니까. 떠날 용기도 없었으면서 언젠간 떠날 것처럼 삶에 정착하지 못했던 태도를 버리고 한 달을 살아도 나의 공간으로 만들고 떠날 땐 미련 없이 털고 일어서야겠다는 것을 이곳 사람의 삶을 통해, Sophee 님을 통해 배웠다.

여기선 얼마나 사실 계획이에요?
글쎄 모르지


돌아오는 전철에서 19세 말레이시아 소녀들과 얘기를 나눴다. 아주 멀리서 학교를 다니고 '소녀시대'를 좋아하고 한국에서 공부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친구집에서 파티가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많이 쓰는 와치앱으로 사진을 보내줬다.

오늘의 자잘하게 쇼핑한 물건들을 정리하며 행복을 느끼는 나였던 것이었다. 전혀 안 해본 스타일의 목걸이 안 입어본 스타일의 옷... 만족한다. 똑같은 건 지겨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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