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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친구 사귀기

혼자 하는 여행기 160708 -2 말레이시아

by 호담

두 번째 날 아침이다. 난 옷걸이에 내 옷을 걸고 사진을 찍었다.

여행지에만 가면 서바이벌 모드 작동이다. 많이 못 자도 상쾌하게 일어난다. 집에서 가장 이쁜 방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Sophee 님과 새벽의 기도 소리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걸 '아란'이라고 한단다. 신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참으로 부지런하다.


알라는 위대하시다.

알라를 찬양하라.



새벽에 해 놓으신 빨래를 같이 널었다. 해가 들고 바람이 잘 드는 테라스엔 가장 적절한 빨래 건조대가 설치돼 있었다. 한국의 조그만 나의 집에서 이리저리 흩날리던, 동분서주 건조대가 생각났다. 마지막 밤까지 빨래를 널어 말리느라 바빴었지... 여기 온 지 2주는 된 기분으로 익숙해질 일상에 스며든다.

방을 나눠 준 미린님도 함께 걸어서 아파트 단지 앞의 상가로 갔다. Sophee님의 이야기 속에 늘 등장하던 목사님 부부와 식사를 같이 하러~ 이 시절에 전인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인이 몇이나 될까. 내 상상 속의 목사님은 50대 중반의 중후한 남성, 사모님 또한 엄마 같이 푸근한 수더분한 중년의 여성이 아닐까 상상해 왔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분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스무 살 언저리에 본 적이 있는 젊은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얼굴을 잘 안 잊는 내 기억력이 그분들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냈다. (당연히 두 분은 날 잘 모르신다.) 내가 착각을 했나 할 정도로 세월이 안 느껴지는 두 분. 어릴 때 이 목사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땐 어리석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순종적이었었다. 좋고 나쁨, 깊음과 얕음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수준도 못 되는, 늘 모든 것을 좋게만 받아들이고 싶었던... 그때 나에게 좋고 싫은 것을 따지는 삐딱함이 있었다면, 이분의 언어가 내 안에 남아있었을 텐데...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그분들의 가치관과 사고가 잔잔하게 전해져 왔다. 이런 분들이었구나. 어리던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을 머무르지 않는 자의 지혜... 난 오랜만에 정화된 언어에 잠겨 휴식하듯 대화했다.


자연스럽게 내 일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두 분에게서 들은 외국에 사는 한국인의 교육 방식에 대해 막막하고 갈피 없는 국어 교육에 대해... 재외 국민 한국 학생들은 여기서도 똑같이 밤 8시 9시까지 학원을 다니고 국제학교를 다녀도 높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내가 하는 수업에 대한 얘기를 들으신 사모님께서 이곳에 수업하러 와 줄 수 있냐고 하셨다.


학원을 그만두기 전부터 막연히 가끔 해외를 다니며 팟캐스트와 인터넷 방송을 동원한 독서지도와 문법수업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살면서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당장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고 언제나 그때가 오면 요동하지 말자고 날 타이르곤 했었다. 5년 전에 인강을 하게 됐을 때, 3년 전에 한겨레에서 독서 수업을 기획하게 됐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할 수는 있지만 계획한 적은 없는 일을 제안받았다.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건너온 너무나 안락했던 저쪽 세계에 대한 미련이 없다는 것은 이제 확실해져 간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려서 MDU에 도착했다. 왼쪽 조수석에 앉는 것이 무척 어색했다. Sophee님의 업무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구내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며 밥을 먹으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내가 잘하는 일을 하다가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게 되는 삶에 대해서,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반드시 구축해야 할, 철학 있는 삶에 대해서



시내에 돌아온 후 나는 혼자 발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아저씨가 금방 된다고 했는데 엄청 오래 기다렸다. 현지인에 둘러싸여 가만히 기다리던 시간... be동사와 전치사라곤 없는 매우 간결한 아저씨와의 영어대화도 나름 재밌었다.


책 싸게 파는 서점! 다음에 다시 들르기로 했다.

내일은 미린양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래서 하우스 메이트들과 송별회를 했다. 난 처음으로 똠양꿍 누들을 먹었다. 태국이 아닌 말레이시아에서... 미린양은 법학, 쉔은 모바일 앱, 션은 무슨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공이다. 쉔과 션은 중국계 말레이시안이고 영어를 무척 잘한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차츰 친해지는 중이다. 쉔은 가방에 물을 2.5리터씩 들고 다닌다. 한 번에 먹냐니까 아니란다. 그럼 왜 작은 걸 들고 다니며 리필해 가며 마시지 않냐 했더니 어깨를 으쓱~. 키가 183이라 힘이 넘치나 보다.


너 이거 운동하는 거야?
어 운동효과 있어.
깔깔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라는 거야

후식으로 빵을 쐈다. 션과 쉔이 "고맙습니다. 누나~." 하는데 진짜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쫀쫀해졌다. 빵집 사줄 뻔했다. 깔깔거리며 수다를 떨다 걸어서 귀가.

다음 날 떠날 싱가포르 여행 준비를 마치고 단지 내에 있는 수영장에서 야간 수영을 했다. 잘은 못 하지만 재밌었다. 유유자적 물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이 뿌옇다. 물 위에 누워 풀의 가장자리를 뱅뱅 돌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맺어야 할 관계, 끊어야 할 관계에 대해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한 당황스러움에 대해... 열망과 혐오에 대해... 이건 좀 더 생각해야겠다.

풀에서 올라오는 지점에는 '연을 쫓는 아이'에나 나올 법한, 중학생 정도의 남자애가 수영은 안 하고 내내 스마트폰 하며 앉아 있다가 내가 올라오려니까 진짜 너무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어서 반대편으로 돌아 나왔다. 거참 열정 있는 놈일세...


12시쯤 정말 쓰러지듯 잠들었다. 4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나 혼자만의 또 다른 여행을 떠나며 이 글을 쓴다. 싱가포르로 떠나는 비행기가 한 시간 뒤 떠난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은 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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