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집 앞에서 동네 친구들이 모여 같이 놀거나 집집을 순례하듯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는데 옷차림이 매우 자유로웠다 더운 여름엔 실내복과 외출복의 경계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 가게에 러닝셔츠와 팬티바람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는데 왜 그랬는진 기억이 안 나고 갑자기 확 뭔가 더 입었어야 하는데라는 각성이 일어난 느낌이 생생하다. 그날이 속옷 외출의 마지막 날이었던 것 같다.
사실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우리 집은 집에서도 항상 옷차림이 단정해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복을 입으셨고 삼촌들을 포함한 가족들은 늘 더운 여름에도 겉옷을 갖춰 입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때때로 친구들을 통해 들은, 남자 식구들이 집에서 속옷바람으로 돌아다닌다는 말은 정말 기이하게 들렸었다.
대학 졸업 직후 우즈베키스탄에서 1년 정도 살던 시절 어떤 여름날 대학생인 친구가 어깨가 끈으로 된 민소매 옷을 입고 나왔는데 한국 옷이라고 했다. 그런데 비즈 장식이나 작은 리본이나 유광의 소재나... 아무리 봐도 이건 속옷이었다 한국에서 그곳으로 옷이 넘어가면서 옷이 너무 고급이라 속옷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의아했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갔었다. 내가 겪었고 기억하지만 인지는 안 하고 있는 이런 얘기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 .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팬티에 대한 가볍고 재미있는 숨겨진 역사의 에피소드가 많은 미시사류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가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사례들이 나와서 신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소련 시절 러시아 여성들이 속옷을 외출복으로 입었다고 한다.)
작가는 일본에서 태어나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수학하고 통역사와 번역가로 살아가며 길러진 다양한 문화의 차이점을 포착하고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는 능력이나 기발하고 춤을 추는 듯한 궁금증을 다스리는 과정이 고스란히 책에 담겨있다. 일본과 소비에트 문화에 대해 다른 책을 통해서는 도저히 접할 수 없는 사각지대들이 포착돼 있고 그것을 풀어내는 필력이 쉽고 재밌고 지적이면서 따스하다.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둘렀다는 무화과 잎이 과연 정말 속옷 형태였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히브리어 영어 러시아어 표현을 다 찾아보고 각각의 버전에서 사용한 단어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 분석한다 거의 다 이런 식의 추적을 하고 집요하게 답을 구한다.
가볍고 재밌는 기억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인류의 초기 역사까지 올라가며 내용이 방대해져서 3분의 2 지점을 넘어갈 때는 좀 어리둥절해 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팬티라기 보단 일본의 속옷인 '훈도시'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이거 너무 편향적인 거 아닌가라는 의심도 든다.
제목만 보면 '팬티'라는 소재로 책을 내면서 또 유행이랍시고 인문학을 걸어줬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얼마나 인문학적인지 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읽으면서 요네하라 마리라는 사람에게 매료되었다. 그녀가 사물을 바라보며 갖는 독특한 질문들 그리고 그것의 답을 찾는 과정 가설을 세우고 입증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섬세함과 성실함은 명백히 인문학적 태도였다.
애초에 이 책은 단행본으로 기획되어 구성을 짠 책이 아니다. 칼럼이 연재된 과정을 다 보여주고 그것의 발전과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본인도 연재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흘러갈지 몰랐고 자신이 써도 되는 내용인지 망설이기도 했다가 일생을 이 연구에 바쳐야겠다는 결심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본격적으로 연구해 뛰어들려고 할 때 난소암이 발견되고 제거했다가 재발하는 과정을 거치며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을 세상에 내야겠다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누군가가 연구를 이어나가 발전시키기를 소망한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니까 이 책 자체가 인문학의 구현이다 개인이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세상을 읽고 연구하며 자신을 고양시키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받고 정리해 나가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결과의 완성도는 떨어질 수 있다.
미시사를 다룬 책들을 읽으면서 형성된 나만의 책 평가 기준이 있다면 필자의 사관을 통해 공정하면서도 독특하게 형성된 이야기가 있느냐이다. 그것이 없으면 서사가 아닌 열거로 끝난다. 나는 서사해 낼 수 있는 개인을 만나게 하는 책이야말로 진정한 인문도서라고 생각한다.
'펜티'가 얼마나 대단한 사물인지 이 책을 읽으며 수긍도 하고 비판도 하며 읽는다면, 죽음 앞에서 멈추어야 했던 시점에서 자신의 과정을 위트 있게 그려낸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결과'가 아닌 '인문학적 사고'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