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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Oct 26. 2020

제주 바닷길 3만 보를 걸으며

2020년 10월 제주도 여행기 day2

여행 와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의외로 숙소로 돌아와 씻고 마지막으로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난 이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린다. 씻고 짐도 정리하고 다음 날 출발하기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혼자 쓰는 숙소일 경우는 작은 귤 만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 놓고 음악을 들으며 사진도 정리하고 여행기도 쓰고 지출 정리도 한다. 벌써 11시다 아직 여행이 5일이나 남았는데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다.

조천리에서 함덕으로 이어지는 길

아침에 게하 사장님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조천리 책방 지기님을 만나 함덕까지 걸어갔다 왔다. 지도를 보니 약 7 km 그 밖에도 여기저기 다녔으니 아마 거의 8km 이상  걸은 것 같다. 나고 자란 도시 춘천에선 언제나 걸어 다녔고 서울에서도 천호에서 삼성까지 이어진 한강 산책로를 거의 매일 오갔으니 걷는 게 익숙한데도 요즘에 온라인 클래스 준비하면서 너무 일만 했던 탓에 걷는데 필요한 근육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래도 일주일 내내 쓸 다리라 많이 안 쉬고 계속 걸었다. 자리에 누운 지금 보니 어제보다 덜 욱신 댄다.


함덕에서 산 모자 끈으로 묶을 수 있다

오늘은 오가면서 관계와 일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사실은 난 근 1년 반 동안 견디기 힘든 업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혼자 일하는 건 외롭고 같이 일하는 건 힘들다. 일의 프로세스가 비슷한 느슨한 협력 구조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결국은 뚫고 나왔지만 사람으로 인해 많은 충격을 받았다. 이 세상에 모두가 동의하는 추상어는 없다. 그래서 신뢰나 믿음을 나누려면 기대보단 경험을 먼저 체크해야 한다. 난 그걸 잘 몰랐다. 기대를 싫어한다먼서 나부터 누군가를 섣불리 믿었단 생각이 든다. 발목이 아프도록 걸으면서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고 지속적으로 사진을 찍고 시선은 하늘과 바다를 고가면서도 머릿속으론 많은 것들이 정리됐다. 난 누군가에 대해 알아가고 정리하고 결론을 내린다고 생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를 정말 많이 알아가고 있었다. 오늘 나는 그런 말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요즘 보니 내가 이런 사람이더라고요.


아름다운 함덕 해변의 저녁 하늘

난 어떤 부류가 되는 것도 싫어하고 외로운 것도 싫어하지만 그중 부류가 되는 건 더 싫어한다. 그걸 누군가가 머리 나쁘고 사회생활 못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고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싫지 않다. 지루한 것이 싫어서 여행을 오고 새로운 것을 느끼고 싶어서 제주도에 왔지만 난 다시 보고 싶은 바다와 다시 보고 싶은 얼굴과 다시 걷고 싶은 길 다시 나누고 싶은 언어를 찾아왔다. 완벽한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을 진취적이거나 도적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규정짓는 말들이  싫었다. 난 아니면 꼭 아니라고 한다. 낯 선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싶다. 독립했지만 혼자이길 원하는 건 아니다. 끊임없이 실망하며 거부하고 있지만 찾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그건 복잡한 게 아니고 정확한 것이다.


아마 난 평생 까탈 부리며 지만 옳다고 우긴다는 평을 들을 거다. 어쩌겠어... 하지만 억울한 평가에 사실은 속이 상했다. 아마 회복할 수 없을 거다. 욕하라 그래.라고 쿨하게 말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 이성과 감정 중 뭐가 더 뒤처진 건지 헷갈린다.

조천리의 6거리 포지판과 비석거리
우물 복원 터

난 한번 보고 안다고 하는 게 잘 안 된다. 사람도 책도 공부도 그랬다. 같은 책을 몇십 번씩 다시 읽으며 대상과 나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 너무 경이롭고 즐겁다. 그래서 난 돌아선 사람에게도 다시 문을 열고 왔던 여행지를 몇 번씩이나 다시 찾고 내가 해석하고 알아낸  것들을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아마 그래서 나는 이야기 해설사가 된 것 같다. 생각을 짓고 이야기를 짓도록 돕는 일의 핵심은 이미 아는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니까. 그러려면 같은 일에서 새로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래서 난 도전 정신이나 모험심이 없나 보다. 안제나 지금 보는 것도 다 못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조천의 선물 가게 '바나 건너온 아름다운 것들'

작고 조용한 것만 같은 조천에도 가끔 와보면 변화가 많다. 옆동네 가는데 돌탑이 이만큼 높아지고 많아졌고 못 보던 예쁜 가게가 생겼고 게하와 민박도 더 생겼다. 용천수 지킴이 모임은 적극적인 이장님의 재선으로 앞으로 3년 더 박차를 가할 것 같고 용천수 지킴이 모임이 열심히 청소를 한 덕에 더 깨끗해졌다. 조천리는 용천수 관리를 잘해서 텔레비전에도 나온 동네다. 난 아까 말한 기간 동안에 내 작은 변화는커녕 큰 변화에도 관심 없는 몇 관계와 이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행에도 문화에도 관심 없는 사람과 내가 절친하긴 힘들었다. 도시 여행을 떠나는 나만큼이나 어색한 관계였다. 그래서 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친구  때문에 서운할 일은 없다.


정말 맛있는 낙지집 동카름

내 하는 일을 잘 알고 내가 쓴 글을 거의 다 읽고 얘기도 많이 나눈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나에게 하는 평가가 '정직하다'이다. 맞는 말 같다. 그 정직함은 나와 사람을 힘들게 하고 내 사회적 성공을 방해한다. 대신에 단단한 인간관계를 맺어주고 나를 괴롭더라도 부끄럽지는 않게 해 준다. 이건 선택이나 의지로는 안 되는 일 같다. 이것 때문에 나와 일하는 분들이 힘들 수도 있기 때문에 난 반드시 실력이 좋아야 한다. 이것도 참 힘든 일인데 이건 노력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정직하다는 것과 방만하게 솔직한 건 구분해야겠지. 좋은 말 쏟아붓는다고 좋은 기록은 아니니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담벼락의 어린 엄마냥과 세 아기고양이

오늘은 2인실로 옮겼다. 꿈꾸는 게스트 하우스의 2인실은 정말 아늑하다. 정말 권하고 싶은 숙소다. 쓰다 보니 1시간 지났다. 이제 자야 겠다. 내일은 종달리로 이동한다.

호담의 온라인 북클럽 어른들의 비밀동화방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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