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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Mar 17. 2021

적당한 태도

심심할 때 나를 찾았던 사람들

적당한 태도

몇 년 전에 베트남 여행을 갔다가 버리고 간 물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사람 생각을 많이 하면서 여행을 했었다. 내가 그 사람이 버리고 간 물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읽고 있던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마침 그 책을 읽었던 강변의 벤치에 누군가 버리고 간 물건이 있었다. 엊그제 공원을 산책했는데 운동기구 옆에 이렇게 예쁜 모형 자동차가 놓여 있었다. 흠도 없고 멋졌다. 하지만 버려졌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차피 존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존재한다. 노력하면 더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노력할 수 없는 그 상태조차 존재의 최선이기에 더 나을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하는 것은 때로 좀 가혹하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별로 서운해하지 않았다. 또는 서운함을 무시했다.

영화 첨밀밀의 남주는 여주가 자기를 이용하는 걸 알아도 그냥 모르는 척했다고 말한다. 왜 그랬냐는 물음에 그래야 너와 친구 할 수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두 시간째 한강을 걷다가 그 대사를 듣자마자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서울에 와서 정말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에게도 베트남 여행을 하는 내내 상처를 회복할 수 없게 서운함을 남긴 그 친구도 모두 나에겐 그런 간절함의 대상이었다.  상대가 예뻐서가 아니었다. 내가 못나서였다. 내 예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누구라도 그런 척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면 곁에 두고 싶었다.

관계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해서 더 노력하거나 공정하거나 정직하다고 해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노력할 수 없다. 못났다고 열등하지 않고 잘났다고 우등하지 않다. 간절하면 열등해지고 간절한 주제에 자기를 아끼면 지속할 수 없다.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다 네가 그런 사람을 곁에 둬서라고 자기를 돌아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관계도 많다. 착한 자녀와 못된 부모의 관계도 차고 넘치고 도덕과 법이 보살피지 않는 관계도 많고 착취와 폭력으로 묶인 관계도 많다.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이 보여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너무 늦어버려서 어쩔 수 없는 관계도 있다.

적당하게 굴고 적당하게 신경 쓰면서 친밀한 관계만이 주는 달콤함은 다 누리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외롭게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관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의 애씀과 노력을 빨아먹으며 누리기만 하고 중요하지만 소중하지는 않은 것을 언제까지나 누려도 된다는 듯이 가볍게 생각한다. 그런 적당한 태도로 살아도 실제적인 괴로움은 당하지 않는다. 소중한 것이 없는 사람에겐 간절함도 아쉬움도 없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소중한 것이 많기를 바랐고 그 소중한 것들을 위해 중요한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포기하는 것이 늘 나여야만 한다면 이미 그것은 소중한 것이 될 수 없다. 내용은 사라진 포장지일 뿐이다.

왜 이렇게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는지 엄청나게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홈랜드>의 캐리에게 브로리다 했던 말이 있다. 네가 날 찾을 거니까 난 괜찮아. 나는 너를 믿어. 중요하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한 사람들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이다. 적당히 힘들어서 심심해서 궁금해서 찾는 사람들에게 지친다. 그 심심풀이가 누군가의 소중한 기회를 희생한 결과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친다.


존재는 장난감이 아니다. 장난감조차도... 장난감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교구로서 고안되고 발견되었다. 심심풀이용이 아니다. 장난감조차도.

나는 공원에서 밝은 조명 아래 혼자 주차 중인 이 모형차를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그대로 뒀다. 원래 주인이 아니라도 누군가 이 모형차의 친구가 돼 줄 사람이 내일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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