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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Jul 23. 2021

모든 것이 '너' 때문이라는 사람들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리뷰

정세랑의 단편 <목소리를 드릴게요>에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문제형 인간'들이 수용소에서 나름 안락한 삶을 산다. 작품에서는 괴물이라고 칭하는 이들은 본인들이 인식도 못하는 유전적 특성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물질적 안정을 약속받고 자유 없는 수용소의 삶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자유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아끼는 누군가도 없었다. 그저 식단이 고급이라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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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어느 날 연선이란 존재가 수용소에 들어온다. 연선이 끌려온 이유는 '중독 유발자'로 의심됐기 때문이다. 연선에게 노출된 사람들을 과로하게 한다는 것이 정부가 품은 의혹이었고 정부는 그게 사실이란 것을 밝혀내지 못한다. 이제까지는 확실한 위험인물을 가려내는 꽤 인도적인 격리조치로 보였던 시스템이 연선으로 인해 다른 필터를 낀 랜즈로 보이기 시작한다. 연선은 격렬히 저항했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수용소에서 최대한 즐겁게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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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 사는 '괴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하고 싶은 모든 행동과 말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괴물들은 연선에게 중독되기 시작한다. 연선이 있어서 즐겁고 연선을 위해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낀다. 수용소는 일종의 커뮤니티로 변하기 시작한다. 작품에서 연선은 괴물들에 의해 '성녀'로 표현된다. 이렇게 괴물은 일반인에게만 위험을 끼친다는 강력한 명제가 깨진다. 괴물은 괴물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수용소 운영이 가능했던 것인데 괴물들이 연선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고 연선은 괴물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병에 걸린다. 연선이 중독을 일으킨 거라면 이들 모두 괴물이 아닌 것이고 이것이 중독이 아니라면 연선은 괴물이 아닌 것이다. 괴물이 아닌 연선도 수용하고 가두려 한다면 이것은 억압이고 혐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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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놓고 총 네 그룹과 토론했다. 토론 참여자 중에는 연선을 선한 영향력을 가진 본받고 싶은 건강한 인간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연선이 뭐든지 잘하는 슈퍼 히어로거나 친절의 화신인 듯 읽어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연선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시선이 이런 수용소의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거라고 반박했다. 특별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믿고 어떤 현상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는 비겁함이 일반인을 괴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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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선의 주도성은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욕망에서 발로 했다. 연선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편견이 없다. 그런 특성에 이끌려 성녀화 시킨 것은 연선을 대상화한 사람들이다. 그 동력은 수용소에 갖혀 지낸 이들의 무시무시한 결핍이었다. 연선이 연선과 비슷한 사람과 같이 있었다면 이렇게 구심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세랑 이 만든 사회는 연선 같은 건강한 사람이 주변인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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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작품에서 수용소는 유토피아처럼 그려진다.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한 곳. 일을 안 하는데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고 맛있는 밥을 주고 감시는 좀 받지만 다른 강요는 없는 곳.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안 봐도 되는 세상. 겨우 이 정도가 우리에게 유토피아로 느껴질 정도로 한국 사회는 꿈과 자유 낭만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 무서운 현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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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노동의 욕망, 싫은 사람과 싸우거나 맞설 의지,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에 대한 애착, 언제나 발동할 수 있는 선택권... 이런 건 정말 상관없냐는 질문을 놓고 진지하게 얘기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영원히 중독 유발자로 찍혀야 하는 연선의 억울한 운명이 숨 막히는 공포로 다가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연선에겐 감정 이입하지 않았다. 연선은 대상화되어 재료로써 이용되기 쉬운 유형의 인간이다. 저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또는 저런 사람 싫다는 극단의 평가를 받았다. 병든 사회에서 연선은 동등한 우정이나 사랑을 누릴 가능성이 낮다. 그런 사회에선 건강한 사람이 괴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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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작품이 따뜻한 이유는 괴물들이 스스로 연선의 삶을 지켜주고 기꺼이 이별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마음에 새겨진 홈을 수용하고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게 옳다는 걸 안다. 연선이 소개하고 보여준 어떤 것들을 계속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연선과 상관없는 자기와의 문제로 수용했다. 중요한 사람은 도구화되어선 안 된다. 그것만이 괴물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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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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