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s 독서일기 9-2 <리스본행 야간 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파피루스라고 불리우던 그레고리우스가 여행을 떠난 후 겪은 가장 당황스러운 사건은 안경이 깨진 일이었다. 유일하게 믿는 의사 독시아데스가 아니면 진료조차 받지 않던 그가 낯선 도시에서 낯선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안경을 새로 맞추게 된다.
11.
'새 안경'이 너무나 잘 보인다. 그레고리우스는 너무나 선명하고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있는 세상에 당황한다. 언제나 '의심하고 상상했던 건너편'이 '현실'이 되자 거리두기와 친밀함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분노한다. 사물들이 멀리 있으며 자기는그로부터 떨어져서 몸을 숨기고 있다고 믿은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었다. 이 사실에 대한 자각은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모호하던 모든 것이 명확해지면서 그는 모든 것이 불편해져 버렸다.
어쩌면 내 영혼을 위해 일시적 실명을 경험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를 방해하는 '성가신 나'의 눈은 실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불편한 새 안경을 써야 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P116 프라두의 글
=> 우연 = 잔인함 + 자비심 + 매력 : 우리를 감독함
그레고리우스에게 일어난 '시력'의 변화는 조금씩 이전의 그를 균열시킨다. 갑자기 이제까지 외면하던 자신의 행색이 눈에 들어오고 신경쓰인다. 그는 안경에 맞는 옷과 신발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사실에 또 분노한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전처 플로렌스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 면에 매력을 느꼈던 여자였다. 그런데 결혼 후 이제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옷을 좀 사지 그래요?' 라고 말했었다. 타인에게 호감을 읽어내던 시선이 같은 것을 보고 불편함을 읽어낸다면 그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이 갈등이 혼자 살던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결혼한 그레고리우스의 잘못일까? 아니면 함께라는 이유로 '개인의 변화'를 요구한 플로렌스의 잘못일까?아니면 달라진 환경, 즉 맥락적 자아를 읽어내지 못하는 각자의 잘못일까?
내가 지금 느끼는 분노는 내적 건강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읽을 줄 알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분노에 회피가 아닌 반응을 한다. 안경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그는 안경에 어울리는 새옷을 사 입는다. 안경이 '자아가 세계를 보는 시선'이라면 옷은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을 상징한다. 늘 자기에게만 몰입돼 있었고 5년 간의 결혼생활에서도 개인을 고집하다가 이혼하고, 이후 19년 간 개인으로서만 살던 그가 처음으로 자아와 타인 모두의 시선을 신경쓰게 된 것이다.
타인을 무시하고 자기에게만 몰입할 수록 내가 모르는, 타인이 보는 나는 커질 수밖에 없다. 나에게만 몰입할 수록 우리는 점점 자기를 모르게 된다. 결혼을 하고서도 조금도 변하려 하지 않았던 그... 그레고리우스는 낯선 자기의 모습을 거부하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보다 지금이 더 매력적이고 편하다는 것을... 플로렌스는 실패한 그레고리우스 길들이기는 행인과의 부딪침이라는 우연에 의해 시작됐다. 운명적인 변화는 생각보다 미지근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것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p123 프라두의 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 귀족이며 독재 시대 판사의 아들이자 잘생기고 유능한 프라두조차 이런 생각 속에서 살았다. 의도하지 않아도 모든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휘둘렀던 그조차도 '모든 만남은 그림자가 아닌지' 의심한다. 관계의 결정권이 있다고 해도 명확한 관계의 투명함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나누는 공감과 소통도, 밤에 스치는 야간 열차의 차창 너머로 보는 상들 만큼이나 불명확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각자에게서 얻는 관계의 안정과 만족감은 매우 모호하다. 그 만족감은 언제 분노로 변할지 모르는 불안의 그림자인 것이다.
프라두는 의사로서의 소신으로 평소에 증오하던, 독재자의 하수인을 치료한 적이 있고 그로 인해 그간 받았던 모든 존경을 빼앗기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향한 타인의 애정은 기대에 어긋나는 순간 분노로 변했다. 이제 아무도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를 존경하고 선망했던 이들 중
그림자가 아닌 프라두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프라두는 기대의 감옥에서
스스로 나올 수 있을까.
죗값을 치르듯, 프라두는 아무도 모르게 저항운동을 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고, 외로움에 대한 냉정한 결론을 흥분도 슬픔도 없이 담담히 적어나갔다. 프라두를 기억하고 존경을 표하던 노파들은 그의 사후에야 진실을 알고는 오랜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프라두는 생전에 상처 받았고 자신이 정의로운 인간임을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 말고는 어떤 돌파구도 허락받지 못했다. 의사의 양심을 지킨 대가로 프라두의 자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얄팍한 정의감을 휘두르는 대중에게 도살 당했다. 그는 마음을 닫았고 외로움에 대한 사색의 전문가가 되었다.
프라두는 끝까지 외로웠다. 잔인한 그의 이웃들은 프라두가 저항운동을 '몰래' 했기 때문에, 그리고 '죽었기' 때문에 용서했고 부끄러워 했다. 프라두가 생전에 받은 고통이 클 수록 노파들의 부끄러움은 커진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가책의 무게가 프라두의 외로움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은 아니다.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프라두의 집앞에 그레고리우스가 섰다. 새 안경, 새 옷을 갖추고 대문안에서 들려오는, 누구냐는 질문에 어찌할 줄 모르고 '침묵'으로 기다린다.
이야기의 커다란 줄기는 아직 평행선이다. 정의로움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왜 그 편에 섰던 것일까. 정치적이라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서? 정의로워서? 주변은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했던 그레고리우스는 그들의 역사 앞에서 어떤 자아와 만나게 될까. 기억해야 한다. 변화를 시도한 그레고리우스는 보수적이며 젊지 않은 사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