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과 영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담 Nov 22. 2016

서로의 존엄을 수호하기

Aprilis의 독서일기 8-2  <삶의 격> 페터 비에리

진실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소망은 내 마음 어딘가에 늘 도사리고 있었다. 오랜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고 싶어서 애면글면 하기도 했고 자학에 가까운 인내를 반복하기도 했고 누군가를 나에게 맞추고 싶어서 내가 옳다는 논리를 만드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만남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속 가능한 만남의 조건은 무엇일까. 애초에 만남의 욕구를 발생시키는 내적 논리는 언제 구성되었을까... 내 존엄을 지키는 것과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 것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때마다 느끼는 피곤함은 해결될 수 없는 걸까. 나의 확신을 무너뜨리는 논리를 만났을 때 난 정말 그 논리 앞에 성숙하게 고개 숙일 수 있을까. 


기대와 주체성

기대는 언제나 실망을 낳기에 기대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내적 요구가 발생시키는 기대를 아무리 차단해도 상대가 주는 정보 때문에 생기는 기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 기대를 발생시킨 것은 너의 말과 행동이었으니 이 실망의 발생도 너의 책임이다. ' 난 그렇게 생각해왔다. 나의 생각을 지지해 줄 일반론은 언제나 넘쳐났다. 나에게 잘못이 없을 때 상대가 잘못인 경우는 너무나 많고 대부분 나의 논리는 말이 됐다. 그러다가 나는 조금씩 일반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사람들을 알아갔다. 그들은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진실했다. 그리고 극단적 이기심이란 것은 순수하기까지 했다. 결국 일반론에 기댄 나의 논리는 한계에 부딪쳤다. 나에게 어떤 기대가 발생할지 그들은 알았을까? 어떤 표정과 말로 자신을 드러내는지 그들은 인식하고 있었을까? 무지했다면 욕할 수 없는 건가?


모든 만남은 불안정하고 변동 가능하며 결말이 불투명하다. 타인에게도 나처럼 어둠 속에 잠겨 있어 때로는 평생 동안 만져볼 수 없는 동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만남은 이렇듯 여러 면에서 무의식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 <삶의 격>


나에겐 정말 많은, 애인이 아닌, 남자 친구가 있었다. 애인이 아닌지 늘 의심과 추측의 말을 듣게 되는 관계도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매일 커피를 사준다면 그는 나와 사랑에 빠진 걸까? 새벽마다 몇 시간씩 운전을 해줬다면? 누군가가 밤새도록 나와 통화했다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달래주고 위로해 준다면? 선물과 메시지가 쌓인다면?


일정한 행위를 통해 마음을 측정할 수 있을까? A의 행동을 했다면 A 만큼의 관계이고 B의 행동을 했다면 B 만큼의 관계일까? 나는 정말로 그런 일관성 있는 논리로 모두를 공평하게 대했던가? 또한 나는 그런 일반론에 입각해 행동하는 사람이었던가?  자리에서 밤을 보냈어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있고 마땅한 사건 하나 없었어도 애틋함이 넘쳐나는 존재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행위를 했든 내가 그에게 호감이 없다면 그 행위를 근거로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논리로 엮을 생각을 할까?


행동 패턴으로 관계를 측정할 수 있다면 세상의 만남은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고 오해와 상처라는 것도 사라질 것이다. 너와 너는 이제 연애를 해라. 너희 둘은 아직 3 만큼의 진도를 더 나가야 결혼이 가능해. 둘은 서로에게 책임이 없다... 이런 말들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추측도 의심도 필요 없다. 모든 것은 행위로 증명될 테니.


하지만 세상에 행로 측정되는 마음은 없다.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했어도 그 자체로 상대의 심연이 명백히 드러나진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어떤 행위를 소통의 실마리로 삼을 수는 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파악한 상대의 의지와 상대가 품은 의지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고 이때 간혹 우리의 존엄성은 위협받는다. 네가 나를 우롱했다. 너가 나의 존엄을 건드렸다. 아무 관계도 아닌데 너는 나에게 지나치게 친밀했다. 난 너를 원망한다. 누군가와 나의 기대가 어긋나면서 주체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존엄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주체성은 널뛰기를 한다. 


개입하기와 거리두기 


<삶의 격>의 저자 페터 비에리는 '개입적 만남'이라는 개념으로써 서로 '연루'되는 관계를 설명한다. 타인의 체험과 행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관계에서는 특정한 반응을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망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 개입적 만남이다. '원망은 가까움이 개입된 관계에서만 일어난다.' 안타깝게도 존엄을 파괴하는, 개입적 만남의 해체는  우리 삶에서 너무나 빈번하다. 개입적 만남을 지속하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의 존엄을 해치곤 하는 존재와 얽히는 일도 많다.

 

만일 과거에 서로 개입하는 관계였다가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난 후 생겨난 거리감이라면 그것은 존엄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가 될 수 있다. -중략 - 과거에는 내게 공감해주었으나 지금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선을 한 몸에 느낄 대 나의 주체성은 대상화되고 물질화된 사건으로 변화될 위험에 놓인다. - <삶의 격>

'친밀함과 거리두기'의 균형은 아마 평생 배워야 할 과목일 것이다. 끊임없나와 상대를 관찰하고 인식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지고 누군가의 존엄은 위협을 당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나드는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지조차 가늠을 못 하겠고 분노와 죄책감을 동시에 느껴야 하는 혼란에 빠질 때도 많다. 그래서 개입하는 관계는 위험하다.

 

그렇다면 어떤 만남이 안전한 개입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 나는 상대의 눈을 못 보는데 상대는 나의 모든 것을 관찰할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인식해야 한다. 난 상대에게 소비되고 있다. 나의 존엄은 보장될 수 없고 전시된 채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될 위협에 노출됐다. 내가 관계 형성에 자발적이었다 해서 상대방이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런 일방적 전시의 관계가 아니라면 개입적 관계는 오히려 안전지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존엄은 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의해서도 지켜진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내가 곁을 준 누군가가 내 존엄의 수호자가 될 수도 있는 법. 내 곁에서 날 바라보는 자는 고민하며 응시하는가 탐욕스럽게 훑어보는가. 관계의 과정 속에서 나는 온전한 감시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나? 기꺼이 관계를 거부할 힘을 갖고 있는가? 내 항의의 언어를 상대는 어떻게 받아내는가?  


비웃음과 조롱과 원망의 말과 다툼보다 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무시다. 분명히 '개입적 관계' 였던 존재가 돌연 거리두기를 가장한 '수동성'을 보인다면 우리의 자아는 무너지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관계의 주도권을 내어주었거나 주도권을 뺏기지 않았다 해도 마음이 상호성을 잃어 온전치 못할 때 우린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자신의 행위의 의미에 몰입한 적이 없거나 의미의 무게를 외면하는 존재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존엄성'이 있을까. 무시당하는 당사자가 되었을 때, 평화롭고 배려심 넘치는 여유로 존엄성을 논하는 것이 가능할까.


정보뿐만 아니라 해명을 하지 않거나 이해를 시키지 않을 경우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무엇이 일어났는가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 중략 - 이것은 단지 해명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굴욕이 되는 이유는, 사실을 숨기기 때문이다. - <삶의 격>


정말 많은 '개입하는 관계 종료'의 결정권자들이 쓰는 방법이 회피다. 서로를 존중하던 관계가 한쪽의 상처와 굴욕으로 균형을 잃으면 이전의 관계가 쌓은 가치들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의 내적 검열의 기준은 생각보다 유연하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빼앗지 말아야 할 것은 관계의 고정성이  아니라 자아의 감독자로서의 권리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자신의 말을 깨고 신의를 저버렸다면 상대방에게 알려서, 결정권을 넘기고 돌아서거나 멈출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신의가 있었다는 이유로 '사실을 숨기는 자'의 비겁함 때문에 존엄성을 잃는 일은 멈춰져야 한다. 모든 관계가 영원할 필요는 없다. 사실을 숨긴다고 해서 숨긴 사실이 묻히지도 않는다. 헛된 비겁함은 반드시 누군가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우리의 '격'이 훼손된다.


검열이 느슨해지면서 그동안 금지되던 소망이 들어설 여유가 생겼다면 그것은 결코 등 뒤에서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을 때 바로 그 현장에 있고자 한다... 내적 검열을 푸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내면의 재배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평가하며 만일 필요하다면 막아내는 사람도 우리 여야 한다. 그것은 단지 내 안의 검열 기준이 아니라 내 자아상 전반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 <삶의 격>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내적 검열을 푸는 현장에 있었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면 나의 개입적 관계는 지켜지지 못할 수도 있다. 나의 완고함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나와 상대가 함께 지켜볼 때 그리고 그 '내면의 재배치'가 지지받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검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던 감독자를 교체하는 어마어마한 성장의 현장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일로 흘려버리거나 인식조차 못한다면 자기 존엄은 지켜질 수 없다. 주체에게 인식되지 못한 자기 존엄이 상대에게 인식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내적 검열의 망이 느슨해진다면 그래서 우리 존재가 좀 더 자유로워진다면 유혹은 유혹의 누명을 벗을 수 있다.

 

압도

반드시 의식과 신경이 차단되어야 권위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집단의 압력이나 위협에 의해, 또는 애정이나 신뢰, 감탄같이 열등한 자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을 우월한 자가 악용할 때도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을 조종할 때 쓰이는 큰 지렛대다. 이들은 단순히 소망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두려움이나 질투, 증오, 편견처럼 한 사람의 세계관을 이루는 감정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 중략 -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타 종교인이나 적에게 내비치는 감정은 그 종교를 믿는 집단의 소속감이 만들어낸 강요와 지도자의 영향에 감복해서 스스로 엎드리는 데서 만들어진다. 어쨌거나 이 두 가지로 인해서 스스로 잠깐 멈출 수 있는 능력과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능력이 마비되며 결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파괴된다. 주입된 사상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 속으로 마구 파고든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비판이나 반론에도 끄떡없이 스스로를 밀폐시키는 절대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 <삶의 격>

관계를 통해 '압도'라는 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필자는 이런 일이 감정의 악용이라고 말한다. 감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점한 자들은 태연히 상대를 바라본다. 아니 때로 그들은 상대방의 상태에 관심조차 없다. 다만 끊임없이 열망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세계관을 내면화하여 감정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고통을 못 느낄 정도로 적극적인 열망이 존재 전체를 조종하는 것. 그것이 압도다.

이러한 세계관이 내면화되기 시작해 마침내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나면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세계관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자신의 권위를 집단이나 한 사람의 영도자에게 내어줄 때, 희생양은 실제로는 완벽한 무능의 상태에 처해 있는데도 오히려 자기가 특별한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집단은 그를 완벽하게 압도하는 것이다. - <삶의 격>


존엄이 지켜지는 이별


나는 절대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부모로부터 권위로부터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나를 구출하는데 거의 평생을 썼고 내 존엄에 관심 없는 존재에게 감정적으로 매달려 자학과 다름없는 관계에 스스로를 바친 경험도 적지 않다. 내가 나의 감시자가 되길 포기하면 난 전시되고 시험당하고 유혹당하고 동정당하고 치료당한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존엄을 지켰다면 성숙하게 누렸을 일상이다.


만남은 언제나 갈등을 동반하고 그 끝에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조율과 협의에 힘써 끝까지 신의를 지킨다 해도 죽음 앞에서 우린 우리의 만남을 마쳐야만 한다. 누구를 만나든 그 관계가 어떤 이름이었든 적어도 두 주체가 독립된 주체이길, 상대의 미래를 열어주는 마음에 넉넉함이 있기를, 불안하지 않기를, 싫증이 나서 더 이상 욕망하지 않아서 맞이하는 이별이 아니기를... 그 가능성의 희박함이 기적의 그것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이러한 관계와 이러한 이별을 꿈꾼다. 그리고 기다리고 찾고 응시하고 입을 연다.


넌 여기서 무엇을 찾고 있니.


우리가 존엄을 지키려는 자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수도 용서도 상처도 치유도 영원히 계속할 수 있다. 모든 이별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서로의 존엄의 수호자가 된다면...




 

글의 모든 제목과 소제목은 <삶의 격>의 순서를 따랐고 인용문을 제외한 모든 글은 저의 글입니다.


북 팟캐스트 '오후 세 시의 여우'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http://podbbang.com/ch/11359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나에게 방해가 된다. - '나'를 선택하는 계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