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과 영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담 Jan 16. 2017

도망, 단지 나만을 위한 선택

Aprilis 의 독서일기 10  <마음의 진보> 카렌 암스트롱

운동으로 건강을 회복하기 전 한 2년 정도 어깨 통증 때문에 고생을 했었다. 어깨가 아플 때마다 아주 오래전 외국에서 나에게 있었던 일이 많이 생각났다. 그때 난 어떤 단체 소속의 봉사자로서 해외에서 1년간 살았고 많은 일을 했다. 체류기간 내내 온전한 휴일은 단 하루도 없었고 단체의 특성상 고충을 토로하는 '불순'한 이야기는 억압당했다. 어린 나이, 미숙한 판단력, 적극적인 순종 욕구가 나의 몸과 마음을 파괴했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알았지만 당시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지금도 드러내 놓고 모든 얘기를 다 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좋은 생각과 행동'을 정해놓고 산 대가로 난 아주 오랜 시간을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살아야 했었다. 타고난 건강함과 젊음이 아니었다면 회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나를 인식하기 전부터 종교에 바친 사랑의 결과였다.

상처가 아물어도 이전 같을 순 없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그것의 '무오'에서 찾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대상의 완벽함에 흠집을 내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다. 그런 심리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조직이 종교단체 또는 국가다. 본체로부터 떨어져 나가 새로운 시각과 방법으로 조직을 대할라치면 가차 없이 경계와 단죄의 칼날이 날아든다. 의구심은 범죄다... 어떤 조직 또는 단체에 둘러싸이면 나의 생각과 판단이 정말 '나'의 것인지에 대해 의심조차 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


그러면 그런 '의심하는 나'를 자각하는 순간
나는 그 조직을 증오하게 될까?


<고슴도치의 우아함>에 나오는 팔로마라는 아이는 TV를 보다가 가난한 나라에서 프랑스로 입양 오는 아이에 대한 생각을 한다. 하루아침에 처음 보는 나라의 국민이 될 것을 강요받는 그 아이가 겪을 심정적 박탈감을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이 겪는 혼란의 이유를 깨닫게 된다.  양쪽 중 하나를 택하라는 강요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일부를 거부당해서 느끼는 분노, 그것이 방화범을 만들고 자살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팔로마는 어리지만 너무나 똑똑하여 '자신이 속한 집단' -기득권을 움켜쥐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탐욕-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어떤   의지처를 찾은 것도 아니다.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도 못하는 현실 때문에 세상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절망한다.


<페르세폴리스>에는 이란에서 자란  한 소녀가 개인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이란과 유럽을 오가며 겪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 역시 자신을 키워낸 시간에 대한 거세 압박의 고통을 느낀다. 유럽에선 무시당하는 중동의 소녀 고향에선 유럽 물이 든 이방인으로 취급받으며 어느 한쪽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는 사람들과 그러니까 양쪽 모두와 부딪친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삶과 언어와 선택이
자기의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바보들이 꽤 많다.


모든 경계가 그렇게  뚜렷한가

<마음의 진보>는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자서전이다 그녀는 17세부터 7년간 수녀였고 환속했다 그녀가 수녀원에서 훈련받던 시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 직전이었기 때문에 중세와 다를 바 없는 형식의 훈련과 사고를 강요받았고 그것을 몸에 익혔다.


그녀는 '기존의 제도가  최악의 상황이었을 때 그것을 경험했다' 카렌이 환속한 것은 69년이지만 '70년대에 들어와서 수많은 성직자가 마치 떼 지어 이동하는 철새처럼 한꺼번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떠났다'는 것을 보면 그녀도 역시 일종의 '끼인 세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녀는 수녀 생활에서 '변신과 짜릿함'을 모색했지만 '7년 뒤 흐리멍덩하게 망가지고 부서진 몸으로 나왔다'라고 회고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카렌이 또 다른 '변신과 짜릿함'을 찾아 환속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그녀는 혼란스러워한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환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떤 추상적인 것을 좇아 일생을 걸게 되는 시기가 청소년기였을 때 그리고 그것이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사회적 상황과 겹쳤을 때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그녀는 몰랐었다.


신에 대한 열망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자기점검이 가능한 나이였다 해도 인간의 의식은 고정된 물질이 아니기에 조직이 원하지 않는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매우 높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것은 인간 조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개혁 직전의 종교집단은 가장 처절하게 인간을 틀어쥐려 애를 쓴다. 수녀원이 조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인재를 만들어내는 곳이라면 대학은 개인이 학문탐구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본질적으로는 그렇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17세에 수녀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성장하다가 대학에 들어가게 된 정황 속에서 완벽하게 구성당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자아는 살아남았다. 왜라는 질문을 떨쳐내지 못한 덕분에 그녀는 첫 도피처에 안착하지 못했다.


그러면 수녀원 시절 이전으로 돌아가서 이제 자유를 누리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할 일만 남았을까?


그저 눈을 감고 싶었을 뿐 내 시선이 가 닿을 곳이 없다면...

무도회에 간 신데렐라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아름답다 칭찬을 해도 12시가 되면 재투성이인 자신을 잊지 못해 두려움에 떨며 도망간다.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아줘도 재투성이 시절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이전 시절의 기억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인간은 연속적인 존재이고 이전의 시간과 이어져있다. 한 사람의 현재를 불연속적으로 보는 시선은 한 존재에게 박탈감을 안긴다. 지금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전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 그것이 존재에 대한 예의이자 존중이다. 신데렐라를 갑자기 여왕 취급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부정이고 학대인 것이다. 재투성이로서의 삶은 여왕의로서의 현재와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카렌 암스트롱은 수녀원에 있는 동안 수녀들과의 우애를 금지당했고 가족들과는 여섯 달에 한 번씩 면회, 넉 주에 한 통씩 편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족에게로 돌아갔을 때 누군가가 자기를 만지는 것도 껴안는 것도 견딜 수가 없는 상태였다. '통과의례는 사람을 혼자 서게 만들지만 나의 통과의례는 나를 기대게 만들었다.' 무덤의 시간 동굴의 시간은 재생과 부활을 가능케 하기도 하지만 그냥 모든 것을 죽여버리기도 한다. 카렌은 '애정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퇴화하거나 심하게 훼손되어서 제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나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라고 회상한다. 자유를 누리는 기능을 상실당한 것이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축하와 축복의 말들은 공허하다. 카렌은 자유롭고 싶어서 수녀원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도망친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억압으로부터...

 

동물은 무언가를 지향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피하기 위해 도망친다. <파이 이야기>




가난한 나라의 아이는 부자나라에 입양된 것을 감지덕지할 것이라는 상상, 이란에서 탈출했으면 이란을 전혀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수녀원을 떠난 이유는 남자를 사랑하고 싶어서일 것이라는 상상, 개신교를 비판하면 신을 증오할 것이라는 상상, 목사를 비판하면 믿음이 없을 것이라는 상상, 성적으로 순결하면 이성을 혐오할 것이라는 상상, 그 반대이면 문란할 것이라는 상상, 일본을 옹호하면 친일파 매국노라는 상상, 싼 옷을 입었으면 가난할 것이라는 상상, 감성이 풍부하면 논리가 없을 것이다 또는 그 반대일 것이라는 상상... 이런 수없이 많은 비논리들 틈에서 숨이 막히는 소수의 사람이라면 그녀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변화는 이전 삶에 대한 죽음 직전까지 마다하지 않은 열정의 결과이며 살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 누군가의 대리만족을 위한 야심 찬 행보가 아니다.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방황했고 기어이 어렵고 좁은 길을 통과했고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낸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찾아낸 길은 다시 '종교'였다.

눈을 뜨고 돌아볼 수 있게 됐을 땐, 다른 눈빛일 수 있었다.

<신화의 역사>를 읽기 전에 작가 약력을 읽고서 나는 종교인이었던 사람이 연구한 신화서를 읽는다는 것에 큰 기대가 있었다. 그 책을 읽은 후에는 그녀가 궁금했고 그래서 <마음의 진보>를 읽었다. 그녀가 겪었던 심리적 갈등과 분노와 절망과 극복의 과정 한줄한줄이 나에겐 참 진실하게 읽혔다. 두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며 써 내려간 주옥같은 문장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나와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1. 종교단체에서 오랜 시간 교육받았다는 것


2. 그로 인해 애정을 주고받는 것에 문제가 생긴 것(이성교제를 금지하는 기독교 단체가 많은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어떤 시기에는 무엇을 하고 그다음 시기에는 애정을 주고받는 일을 하면 된다는, 캐릭터 키우기 게임에나 적용하면 훌륭할 이 놀라운 발상은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로 진실하게 받아들여져서 정말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 중에 간혹 나 같은 사람이 생기는데 알고 보면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이중생활을 해서 각자 살 길을 지혜롭게 찾아간다. 다행히 그런 억압이 없는 곳이 정말 더더더 많지만 나나 카렌이나 가장 안 좋은 시기를 겪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포기했다. 한편으론 매우 위안이 되었다 )


3. 일정기간 가족과의 소통에 장애가 생긴 것(종교로 인해 힘든 얘기는 집에서 절대 하면 안 된다고 교육 받음)


4. 아픈데 보살핌을 못 받아 병을 키운 것(카렌은 간질이었는데 오랜 시간 자신이 정신병자인 줄 알았고 나는 봉사기간 동안 세균성 질병에 감염됐었는데 방치되어 왼쪽 팔 마비가 오고 병원에 오래 입원했었다. 그녀와 나 둘 다 종교 지도자의 방치와 외면으로 그렇게 됐다)


5. 기도라는 것이 정말 반드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하는 정해진 형식으로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어느 날 나는 왜 개신교도들은 늘 하루에 일정한 시간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시간만 기도로 생각하는가에 대해 궁금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은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24시간이 기도일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갔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그러니까 논리적 신학적 역사적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못 만났었다.)


6. 모국어 문학을 전공했고 특히 언어적으로 파고들면서 문학에 접근하는 것


7. 나중에야 신화에 이끌린 것


8. 끊임없이 물질에 대 혼자라는 것에 대해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불안과 우울감을 느끼는 것


9. 억울하거나 또는 안타깝게 지적 좌절을 겪은 것(카렌의 경우 박사논문이 거절된 후에야 부당함이 밝혀졌고 나는 임용고사 한 달 전에 갑자기 시행된 가산점 법 때문에 임용고사에 떨어졌는데 문제가 발견되고 적용 범이가 수정된 뒤에 전년도 피해자들은 구제되지 못했다. 난 일차 상위그룹이었지만 결국 나보다 40여 점이 낮은 과락 수험생이 당당히 합격했다. 속수무책이었다. 내 현재가 구성되기까지도 역시 다양하고 결정적인 사회적 요소들이 작용했다.)


10. 교사생활을 한 것. 그러면서도 공허했던 것.


11. 강의를 할 때 '어떻게 사고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끌어올려줄까'를 고민하는 것


12. 사도 바울의 입장에 대한 견해


많은 독서가 그렇듯... 읽는 내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놀라웠다.


물론 그녀는 엄청나게 지적이고 똑똑하고 유능하고 용감하고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겪은 일들을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위안을 받았고 44년에 태어난 어떤 여성이 이 모든 삶을 다 살아내고 그것을 기록해 준 덕분에 누리게 된 지적, 정서적 호사에 깊이 감사했다. 그녀는 나와 동떨어진 초월적 영웅이 아니다. 고난과 시련을 겪고 조력자와 함께 삶을 일구어내는 일상적 영웅이다.


그녀의 글이 나에게 공감을 일으켰고 '종교'에 대한 내 생각에 지지를 보내왔다. 그 자리가 어디든 '확신'은 위험하다 '확신'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억압하고 억압은 사랑과 연민이 아니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종교를 벗어난 것이다. 그녀의 글은 믿을 만하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가 싫어할 글을 쓸 때 두렵고 어떤 사람은 이 글을 싫어하겠구나 내 진심과 아픔보다 표현된 단어 때문에 나를 떠나겠구나. 예측이 되어 움츠러든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위축된다. 하지만 (예수가 그러했듯) 제자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태도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음은 무너질 때도 있지만  어떤 시기가 되면 걸음을 뗀다.


같은 지점을 점점 넓게


이 책의 표지에 나선형 계단이 그려져 있다. 인생은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그것은 인생이 '나선형 계단'이라 그렇다. 맴도는 것 같아도 우린 올라가고 있다. 모든 것을 아우르며 점점 큰 원을 그리며...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유럽이 겪은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그것을 둘러싼 학계와 정치계의 움직임, 사회가 개인의 삶과 종교에 끼친 영향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나에겐 다양한 공부가 된 책이다. 그녀는 비틀스와 세계 공황과 걸프전과 대처 수상의 이야기를 자신의 일생에 일어난 일로 꿰어가며 씨줄과 날줄이 엮이는 사고의 본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냈다. 나도 평생 계단을 오르는 꿈을 꿨었다...


그녀가 겁쟁이였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그녀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 나에겐 힘이 되었다. 그녀가 겪은 일을 글로 써준 덕분에 내가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의 나에겐 정답이 없고 정답은 앞으로도 없을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난 살아있고 여긴 지옥이 아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일은 일단 실행했다.


그녀가 위안을 얻은 워즈워스의 시구가 좋다


서러워하기보다는 차라리
남은 것에서 기운을 얻으련다




https://www.facebook.com/kkazzaya

매거진의 이전글 흐릿한 기대에서 명확한 분노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