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s 독서일기 11 < The Grandmothers>
<투 마더스>라는 영화가 있다. 가장 친한 두 친구가 서로의 아들과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막장 아침드라마 소재로도 채택이 힘들 것 같은 내용의 이 영화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도리스 레싱의 단편 소설 <그랜드마더스(The Grandmothers)>가 원작이다.
1919년 생인 작가는 어느 술집에서 만난 청년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고 깊은 공감이 가능한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느껴서 작품화했다고 한다. 국내에 번역서가 나오기 전에 영화로 먼저 소개된 이야기이고 야한 영화는 아니다.(19금이지만) 그들의 사랑과 감정에 대한 묘사가 어떨지 기대를 많이 하고 봤다가 실망한 기억이 있다. 당시엔 이 소재가 여성들에게 설득력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게 잘 묘사되길 바랐었다. 왜 나는 이 이야기가 '설득력'있다고 느꼈을까?
영화를 본 후 몇 년이 지났고 번역본이 출간됐다. 다시 1년쯤 묵혀 있던 책을 오늘 아침에 펼쳐 읽었다. 역순행적 구성으로 단순하게 흐르는 이야기. 서술이 많아 복잡할 것이 하나 없는 이 이야기를 읽고 의혹은 더 커졌다. '이게 다야? 섬세한 감정 표현이 더 나와야 하지 않나? 이 담담한 삽화들은 뭐지? 할머니. 이 이야기 끝난 건가요?' 난 도리스 할머니만큼 살지 않았기에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분명했다. 어릴 때부터 단짝인 두 여성이 서로의 아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연인으로 묶이고 그 아들들이 다른 여인과 이룬 가정에서 낳은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 22세기쯤에나 가능할 듯한 이런 이야기가 놀랍게도 <천일야화>에도 나온다.
그녀들 자신도 잘 알고 있었고 이 그릇된 정열에 저항하려고 발버둥도 쳐보았습니다. 하지만 매일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상황인 데다,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그들을 귀여워하고 그 매력 앞에서 황홀해하던 습관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지요. 결국 그네는 거센 정염의 포로가 되어 자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네에게도 왕자들에게도 더욱 불행했던 일은, 일상적인 애정에 익숙해진 왕자들은 왕비들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이처럼 끔찍한 불길을 전혀 눈치재치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천일야화> 중
작가는 1919년 페르시아에서 영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예라자드를 통해 이 이야기를 접했다는 말은 없으니 작가 자신은 정말 술집에서 만난 청년이 들려준 이야기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도록 비슷한 묘사가 <그랜드마더스>에도 나온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네 사람은 서로의 몸에 너무나 친숙했고 십 대 후반에 접어든 소년들은 마치 '젊은 신'처럼 아름다워서 보는 두 엄마들을 황홀하게 했던 것이다. 소설에선 이 모든 장면을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흘려보낸다. 도리스 할머니는 그 청년이 들려준 이야기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느꼈다. <천일야화>를 구비 전승하던 여인들은 이 이야기를 전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겉으론 욕하고 속으론 상상하고 공감하고 동경했을까?
<천일야화> 속의 두 왕비는 서로의 아들인 왕자에게 사랑을 느껴서 유혹하다가 거절을 당한다. 여기선 왕자들이 단호히 거절하고 여행을 떠나는 에피소드로 이어지고 왕비들의 욕망은 왕자들에게 닥친 하나의 시련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젊음과 생명력 그리고 순수한 몰입에 대한 여성의 열망은 현대의 이야기 속에 살아남은 것이다. <그랜드마더스>의 아름다운 남자 이안은 친구 톰의 엄마인 로즈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고 관계를 정리하려 했던 로즈에게 분노를 느낀다. 절대 '젊은 여성'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1919년 생의 이 작가는 왜 노년에 이 이야기를 아름답다 여기고 단편으로 남겼을까?
이 이야기는 왜 살아남았을까? .
내가 설화 공부에 몰입하게 된 것은 인간에 대한 모든 학문의 원천이 설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재해석이다. 그리고 재해석되는 이야기들 다시 말해 살아남는 이야기들은 각자 생존의 이유를 품고 있다. - <빵의 역사>나 <달과 여성의 신비> 같은 책도 그 믿음을 뒷받침해 줬다. - 그렇다면 이런 에피소드는 왜 재생산되고 있을까?
일단 일부다처제 문화권에서 어느 정도는 발생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든다. 유교문화가 지배적이었던 동양권에서는 이런 발상의 설화가 거의 없다고 보는데 <신데렐라 천 년의 여행>이란 책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우리에게도 심청과 심봉사의 관계를 전생의 연인으로 설정한 버전이 있다. 그리고 외간 남자를 많이 만날 수 없었던 조선 시대에는 근친 간의 성스캔들이 많았다. 대면이 가능한 이성은 오직 가족뿐이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란 뜻이다.
결정적 시기에 어느 한쪽 부모에게서 온전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대리 욕구는 현대에도 쉽게 관찰된다. 결핍된 부성애 또는 모성애와 이성에 대한 성적 지향을 혼돈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역으로 남편 또는 아내의 사랑을 충족받지 못하는 사람이 자녀에게 집착하고 완전한 독립을 원치 않는 경우도 흔하다. 작가도 그 청년들의 어머니들이 어떤 성장배경을 갖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천일야화>의 두 왕비는 원래 아름다운 왕자의 사랑을 받아 결혼한 사람들이었고 그 사랑의 이야기도 길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어 그 왕자는 왕이 되었고 재미 없어지고 매력 없어졌다. <그랜드 마더스>의 두 여인은 각각 화려하고 인기 많은 그리고 주체성 강한 젊은 시절을 보냈고 한 명은 무난한 결혼 생활을 하다가 남편의 이직과 감정적 독점에 대한 거절로 이혼했고 한 명은 바람둥이 남편과의 문제 있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다가 사별했다.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해 봤다. 우리 삶에서 무언가 결핍되면 채우고자 하는 열망에 평생 지배당할 수 있고 욕망 처리가 잘못되면 많은 것이 어그러진다. 사실 어떤 감정의 발생보다 중요한 것은 처리가 아닐까 <천일야화>의 주인공들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은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너무나 사랑해서 그토록 우여곡절을 겪었던 커플은 안락한 궁전 생활로 행복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고 간단하게 배신하고 욕망에 휘둘린 것을 보면서 설화에 그려진 이야기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를 들여다볼 줄 안다면 우린 많은 시행착오를 건너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교훈과 억압을 위한 이야기로 시작됐을 수도 있다.
두 번째 시선으로 바라봤다.
문제 될 게 있나? 근친에 가까운 사이이긴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 그리고 누구보다 안정감 있고 친숙한 관계.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마음보다 몸이 더 익숙해져 버린 사람...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남자들의 역사 속에 젊은 시절 또래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서 사랑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다시 어리고 젊은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가 넘쳐났듯이 여성들의 역사 속에도 그런 이야기의 맥이 이어져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1919년 생의 도리스 할머니,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다양한 직업을 거쳤고 두 번의 이혼을 거쳤고 여성주의 문학을 써 내려갔던 반골기질의 여인. 2013년 11월 영면한 이 아름다운 여성이 왜 이 이야기를 살아남게 했는지... 난 오늘 하루를 고민하고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아졌다.
반짝거리던 시절이 지나가고 아름다움이 흘러넘치던 시절이 지난 여인들의 마음에 이토록 결연하게 파고드는 굳은 의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인가.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가 아름답고 자연스러우며 담담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리라... 그것이 나의 시대가 아니어도 된다. 아마도 도리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데? 우리가 그렇게 영원히 살면서 너랑 톰은, 중년이 된 두 남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로즈와 나는 늙고, 그다음에는 너희도 늙고, 딸린 가족도 없이, 로즈와 내가 늙고, 늙고, 늙어서... 우리는 지금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는 걸 모르겠니?"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녀의 아들은 차분하게 말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와 로즈는 언제나 젊은 여자들을 여섯 배는 능가해요."
거의 100년을 사신 도리스 할머니의 이야기를 나도 한 60년쯤 후에 읽으면 다 이해할 수 있을지... 그런데 지금 읽어도 아름답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