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리스본행 야간열차> 3 : 만남 13~23
그레고리우스는 문두스라는 별명이 있던 사람이다. 세계, 우주, 하늘이라 불리는 완벽한 고전어학자, 파피루스라 놀림받던 남자... 언제나 정해져 있는대로 살고 움직이지 않는 것에만 정통했던 사람... 그랬던 그가 지금은 낯선 도시 리스본에 가 있고 포르투갈의 의사이자 작가인 프라두를 아는 사람을 만나러 다닌다. 프라두를 숭배하는 여동생, 저항 운동가인 동료, 관찰자 또는 방관자인 막내 여동생, 절친, 스승이자 말벗이었던 신부...
안경을 바꿔쓰면서 옷차림도 달라진 그는 이제 타인을 위해 혀를 데어가며 뜨거운 차를 마시기도 하고, 힘들어하는 여인의 땀을 닦아 주기도 하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던 행동은 연민과 공감의 행동으로 나아가고 뒤늦은 탈선과 흐트러짐까지 일상이 되어간다. 리스본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호텔방에서 맞이하는 낯선 느낌.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P195 신부의 회상 ㅡ 프라두의 스승
한가지 틀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었지 마음속에 존재하는 갈라진 틈과 균열과 단층은 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소. 위압적이고 도를 지나친 자기 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아채면 아마데우는 깜짝 놀라 의기소침해 졌고 이런 상황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소
자신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타인과의 사이에 틈을 만든다. 이것이 지속될 경우 어느 순간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무감각해 질 수 있다. 프라두는 그런 면이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눈으로는 전혀 보지 못하는 천재...
p 246 아드리아나의 회상 - 프라두의 여동생
오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가차 없이 솔직했던지! 자기 기만과의 싸움에 그렇게 사로잡혀 있다니!
아드리아나는 프라두의 숭배자였다. 프라두가 독재 정치의 하수인을 치료한 이유로 이웃들의 비난을 받은 그날 이후, 그녀는 오빠의 글을 훔쳐보게 된다. 그리고 두 남매의 관계에 대한 신뢰는 소멸된다. 들키고 안 들키고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보다도 그녀가 자신의 배신을 잘 안다. 이것은 그녀의 마음에 독이 된다. 신성시하던 인물에 대한 배신은 스스로의 자존심을 파괴하고 관계를 깨버린다. 이럴 경우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의 상처가 더 크다. 더이상 동경의 대상에게 갈 수 없음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가까워 지고자 했던 마음에서 한 행동의 결과가 오히려 관계를 깨버린 것이다.
P 284 조르지의 회상 - 프라두의 절친
제일 허무한 건 욕망이고 그 다음이 만족이며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는다는 편안한 느낌도 언젠가는 결국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고.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우리 감정을 다치지 않고 그 일들을 견디어 내기는 힘들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신의가 중요하다고 했지.
그는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 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자기 자신에 대한 신의라는 것도 존재할까 자주 생각했소. 생각으로든 행동에서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의무 말이오. 자신을 더이상 좋아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편을 들어줄 준비자세
단짝 친구 조르지와 아드리아나는 믿음과 신뢰의 문제에 몰입하는 모습의 프라두를 기억하고 있다. '신의는 영혼의 견해 표명이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다. 신의라는 것은 우리 삶에 일어난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바꿀 수 있다. 프라두는 그것에 집착했다.
왜 그랬을까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아닐까.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자기 고통에 몰입한 나머지 영혼의 결정, 영혼의 떨림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한다. 프라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순간에조차 우리를 지지할 자세라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어떨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 나만 아는 기만을 감싸고 덮어줄 용기와 사랑이 우리 자신을 향할 수 있을까. 아무도 지지해 줄 리 없는 결정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자기 혐오에 몸이 떨릴 때조차도 고집스럽게 영혼의 떨림을 따라가는 또다른 자아가 나를 지지해 줄까.
프라두를 그토록 숭배했던 아드리아나조차 '오빠를 사랑하고 걱정하기 때문에'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와의 신의를 저버렸다. 아드리아나는 자기에 대한 신의를 지킬 수 있었을까. 그녀는 프라두를 기억하고 숭배하는 자기의 모습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것은 프라두의 행복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녀 자신을 위해 선택한 신의일 뿐이다. 신의라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할까. 타인을 위한 것이어야 할까. 내가 나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타인과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프라두를 추적하면서 그레고리우스는 변하고 있다. 고향에 남아 있는, 자신이 근무했던 학교의 교장과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온 안과 의사 그리고 제자들... 그들은 이미 그레고리우스의 변화가 일으킨 영향을 받고 있다. 그가 영혼의 떨림에, 영혼의 결정에 따라 움직인 결과로 자신과 타인 모두가 변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신의를 보이는 것은 항상 한 방향을 향해 전진해 나아가기만 할까? 언제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P292 프라두의 글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고 수집해야 한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원래 프라두는 실망을 무척 싫어한 사람이다. 그는 교회와 학교, 정부와 이웃들의 위선에 끊임 없이 실망했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기 위해 실망뿐인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기 해체의 전문가였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끊임없이 실망했으리라... 그의 아버지는 가정의 독재자 였다. 프라두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억압돼 있다. 진리의 말씀인 줄 알았던 성경에서 배운 것들을 세상의 언어를 배워가며 다시 보게 됐다. 그는 신에게도 실망한다. 프라두는 의사로서의 양심을 지키고 또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저항 운동을 한다.
애초에 1부를 읽으면서 의아했었다. 왜 저항운동이 나오는 걸까 그레고리우스같은 사람과 저항 운동이 무슨 상관인가... 생각해 본다... 정의라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 싸움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했을까 우리가 개인의 발전 또는 자기 해체를 겪으며 끝까지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면 어디까지 가게 될까 프라두는 누구를 위해 저항 운동을 한 것일까 그가 정치에 관심은 있었을까? 그가 타인에게 관심이 있었을까 '이것이 정의다. 이것이 인술이다.' 하는 판단은 모두 타인이 하는 것이다. 프라두는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것과 실망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 일의 결과가 어떤 파급력이 있는 지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까운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랑조차 전혀 건드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며 지속했다. 그로 인해 누가 상처를 입든 관여하지 않았다. 자기가 유일하게 믿고 마음을 연 여인의 입장조차 생각해주지 않았다. 실망을 통해 확인하는 욕망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이제 이곳에서 만난 저항 운동가 '에사'의 일상에 파고들었다. 호텔 직원도 서점 주인도 새로운 안과 의사도 아드리아나도 그를 안다...프라두의 절친이었던 조르지의 약국에 왜 불이 켜져 있는 지도 안다. 그는 모습도 마음도 행동도 변했다.
그리고
어느날 아침
길을 잃은 느낌, 그 낯선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는 베른으로 돌아간다 그가 휘저어 놓은 잔잔한 일상의 파장들을 모두 모른 척하고 오로지 자신의 평안만을 위해 도망친다. 과거로...
그런데 이제 그곳은 이전의 베른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가 변했기 때문에...
리스본에서는 베른이 탈출구였다. 이제 이곳에서 그는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그레고리우스는 집요한 회귀본능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이미 눈이 밝아졌기에 익숙했던 옛 안경을 다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선명하게 보이는 세상 속에서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가 영혼의 떨림을 영혼의 의지로 바꾼 것은 잘한 일일까.
단지 현재의 시간에 충실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전의 나와는 너무나 다른 내 모습의 생경함에 공포가 엄습할 때. 도망치듯 몸을 빼서 익숙한 장소로 돌아가 다시 평화가 깃들길 아무리 원해도 소용 없다. 내가 원해서 걸어간 길이 익숙했던 옛 발자국을 덮어버렸고 회복하고 싶었던 평화는 무료함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 평화를 가장한 무료함의 시간이 이전과 다른 색깔과 향기를 낸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내가 다르기 때문에... 내 의지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우연과 필연 사이에 신의에 대한 내 태도가 우두커니 서 있다. 내 신의와 내 자아의 결정은 오로지 나만의 것일 수 있을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본적이 있냐고 의도했든 안 했든 본인의 발걸음과 도약이 만든 파장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당신이 그냥 파피루스로 남아서 그 눈오는 날 리스본행 야간열차만 타지 않았다면... 프라두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냥 평안하게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레고리우스는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일상을 휘저어 놓고 잊혀져가는 프라두를 부활시키고 그 결과로 얻은 것이 많으면서도 겁이나서 도망을 와 버린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변화는 절대 개인만의 것일 수 없다. 프라두가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던 억압과 죄책감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 추적해가는 그레고리우스는 자신과 세상 사이의 벌어진 틈 어딘가에서 당황한다. 실망을 회피하며 살던 그에게 실망을 수집하던 남자의 삶은 어떤 의미일까. 그레고리우스는 이제 어떤 길을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