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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Jul 31. 2017

폭로와 고백 사이

Aprilis의 독서일기 8 -3 <삶의 격> 3장을 읽고

어느 날, 북클럽 수업 중 느낀 점을 간단히 적어 짧은 감상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것을 읽은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북클럽 마케팅에 나쁘지 않겠냐.'라는 말을 했다. 그걸 읽고 북클럽 회원이 아닌 사람은 본인이 글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 때문에 수업 신청을 꺼려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필터링이 되지 않겠냐. 상관 없다고 말했다. 자아의 은밀성에 상당한 무게를 두는 사람은 아무래도 소통과 변화를 추구하는 북클럽엔 맞지 않으니 북클럽 가입 희망자와 북클럽 관리자가 서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필터링이라는 말을 썼다. 나는 상대방이 나를 걸러내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문화나 사회 현상 등 보편적 실제와 관련된 것도 많지만 구체적 실제인 사람과 관계있는 일도 많다. 그중에 어떤 생각의 실마리가 되는 일이 있으면 글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내가 A라는 사람과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통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하게 된 성찰을 글로 썼을 때, A가 아닌 사람들은 그 글을 편하게 읽고 생각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A가 등장하는 그 글의 내용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예찬적이지 않을 경우,  A는 이 글을 A를 비난하는 글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나는 삶의 결을 글로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안 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디까지 써도 되는 거지? 이 문제 때문에 거의 1년을 쓰고 싶은 글을 못 썼다.



북클럽을 운영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북클럽 운영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이야기들을 종종 페이스북 포스팅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개인의 이름이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신경 써서 찍은 과제물 사진을 첨부하여 글을 올렸었다. 그런데 그 사진에 포함된 과제물이 자기 것인 줄 알아본 당사자가 연락을 해왔었다. 자기 숙제 때문에 그런 고민을 했냐는 것이다. 그렇지도 않았지만 만약 그랬다고 해도 해당 과제물을 뻔히 알아볼 것 알면서 함께 포스팅할 이유도 없었다. 아니라고 해명하고 일반적으로 하는 고민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때 한편으론 매우 황당했다. 짐짓 모른 척하고 넘어갔지만 그때 상대방은 매우 공격적이었고 자기 과제물 때문이라고 하면 싸울 태세였다. 그 사람의 과제물 때문에 한 고민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만약 사진 없이 포스팅한 내용이 그 사람을 염두에 둔 글이었다면, 당시에 매우 예민하게 나를 모니터링하고 있던 그에게 나는 사과해야 했을까?


나의 고민

1.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하는 생각과 고민은 나의 것일 수 있을까?
2. 난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나의 생각을 은폐해야 하는가?
3. 그렇다면 나는 과연... 글 쓰는 일을 할 수 있을까?
4. A에 대한 고민을 할 경우. 내 고민의 공개 여부는 A의 의사를 우선해야 하는가?


글을 쓰면서 나의 사생활을 밝히는 것. 나의 가장 은밀한 생각을 나누는 것에 대한 각오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알게 된 후. 누구와도 관계없는 완전히 자유로운 나만의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글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나는 학부모, 공무원, 학생, 종교인, 학원계 종사자 들을 늘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도 의식한다. 난 어느 순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전의 방식으로 살던 시절의 사람이 신경 쓰이기도 한다. 이런 시간을 겪으면서 내 문장은 그냥 멈춰버렸다. 누구의 삶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나의 삶을 나누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누구도 언급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된 나만의 사색으로 나를 설명하고 그려내는 것이 가능한가. 사실 적시를 모욕으로 느끼는 사람이 엄연히 존재하고 공감받지 않으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난 많은지 알기에 나에게 매우 어려운 고민거리였다.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 3장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나의 생각을 좀 더 다듬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읽고 쓰고 말하든 난 누군가의 존엄성을 건드리지 않고 싶고 나 자신의 존엄성도 지키고 싶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되기 위해서 난 아주 깊이 이것을 이해해야만 했다. 페터 비에리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도 언급했는데 나도 역시 페터 비에리처럼 그저 한 번쯤 정리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은 자신의 것과 남이 알아도 되는 것을 구분하고자 하는 욕구 와도 관련이 있다.

<삶의 격> 3장


내 결함이 다른 이에게 공개되는 것이 왜 그토록 두려운 걸까? 폭로에 대한 두려움의 정확한 대상은 무엇이며 당장의 수치심이 유발하는 강력한 정신적 붕괴 상태의 순간에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이다

<삶의 격> 3장


정체가 폭로된 사람의 수치심은 잊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문제라고 해도 내가 원치 않았는데 내 수치가 공개되었을 경우. 당사자의 존엄성은  훼손된다. 상대가 의도했든 안 했든 내가 공개를 원치 않았던 어떤 진실이 폭로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해도 수치심의 비밀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상실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수치의 지점을 의식하고 있을까? 수치를 느끼는 어떤 지점을 막아버리면 우리는 존엄성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거나 들킨다 해도 그것을 알아챈 사람의 입과 손을 막으면 수치를 의식하는 우리의 자의식이 풍성한 존엄을 누릴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난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나에게 질투를 느끼거나 불편함을 느끼거나 억압을 느끼는 사람을 많이 봐 왔다. 그중에는 갈등하고 소통해서 설득이나 해명을 통해 공감의 영역을 넓힌 사람도 있었지만 예측과 상상만으로 마음을 닫고 끊임없이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도 많이 봤다. 나 또한 어느 지점에서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다. 은폐만이 답인 문제도 더러 있지만 수치심에 대한 모든 답이 은폐는 아니다.


수치심을 극복함으로써 존엄성 지키기


존엄성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될 권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삶의 격> 3장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동기를 찾는 과정에서 정직해야 한다. -중략- 그러나 이해와 정직성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후회라고 불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 후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과오를 명명백백하게 인지하고 그 과오로 인해 자신에게 도덕적인 흠결이 생겼음을 개탄하는 것이다.
<삶의 격> 3장

솔직히 이 문제는 나에게 아주 어려운 주제였다. 나에겐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수치심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수치심이란 것은 남이 보기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어떤 특징이나 기억, 삶의 관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수치스러운 어떤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미 자기만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며 고통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수치심이 근거 없는 주관적 억압 때문이라면 거기서 벗어나야 하고 객관적 도덕의 문제라면 정직하고 건강한 후회를 경험함으로써 스스로 그 속박을 풀어야 한다. 이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수치심을 안고 있는 지금 자신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 스스로가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


품위 있게 드러내기

인간의 존엄성은 자신의  사적 공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사고 과정의 가장 깊숙한 영역을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내 보이지 않는 자세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가장 감추고 싶은 심정을 대중 앞에 공개하는 행위 자체에서 존엄성을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삶의 격> 3장


어떤 사람이 절대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감출 것을 없애버려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였을 경우. 일단 필요한 것은 수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미 인지했으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문제는 대부분 우리 스스로 잘못됐음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타인을 통해서 폭로되거나 설명되는 것보다는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인도적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자기 존엄을 지키는 방법인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문제에서 잡음이 났다고 해보자. 서로가 사랑했거나 사랑하는 척을 했거나 사랑하는 거라고 오해하게 했거나 등등 여러 가지 일이 인간 사이에는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 어떤 감정의 교류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구는 사람이 간혹 있다. 애정의 문제에 스스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민 결과이다.


서로가 나눈 것이 무엇이었든 많은 시간 나눈 사적인 이야기들, 따뜻한 눈빛과 목소리, 부드러운 손길은 거짓일 수도 없고 감정이라는 것의 교류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변했다는 이유로 있었던 일 자체를 부정하는데 동시에 죄책감을 느낀다. 어떤 감정의 표현이 명백한 언어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 감정의 시발이 자기다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런 부정의 태도를 취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이다. 하지만 밝은 곳에서 찬찬히 살펴보자. 어떤 일이 발생했고 시간이 흘렀으며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일에 무게를 싣는 것은 부정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자기 자신일 뿐이다. 가벼웠거나 비도덕적이었다고 해도 사실이었음을 인정하는 것만이 상대방의 입을 통해 내 행동이 해석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분노로 해석될 때 상황은 악화될 수밖에 없고 이런 형식의 폭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든다. 이런 경험은 은폐의 역사를 지속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수치심이 타인에 의해 폭로됐기 때문에 더더욱 방어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존재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동 또는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극복될 수 없는 수치심이 안전하게 은폐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품위 있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은밀함을 드러내는 행위는 무조건 찬사 받아야 할까? 그것은 언제나 용기 있는 행동일까?


품위 없게 드러내기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그리고 머리 속에서 한 번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사적 영역을 공개적으로 다시 말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훤히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본문 중

가끔씩 나는 '사생활의 느닷없는 초대'에 소환되곤 한다. 이 초대의 장은 언어로 인해 실현되므로 거부의 기회가 없다. 내 마음이 상대를 믿고 싶다는 욕망에 지배된 상태일 때는 이 폭력적인 친밀감을 애정의 표현으로 착각한다. 감춰진 성생활, 도덕적 결함, 인간 차별적 성향, 친밀한 존재에 대한 증오심이나 적대감, 타인의 비밀, 가정의 불화, 물질적 빈곤 같은 민감한 문제들을 전혀 알기를 바라지 않는 나에게 줄줄이 풀어놓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나는 특수한 종교적 분위기 안에서 이런 상황에 대해서 늘 들어줘야 하고 받아줘야 한다고 배워왔었고 그 규범에 억압당한 채 나의 존엄을 훼손하며 살아왔었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누군가의 응급용 면죄부 역할을 하면서 거짓 우정을 쌓고 있을 확률이 높다.


'품위 없는 고백'의 문제는 고백하는 당사자가 거짓 친밀함을 통해 면죄부를 얻으려고 한다는데 있다. 거짓을 기반한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호의와 관용을 착취하며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해성사를 반복한다. 수치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일방적으로 하게 되는 고백은 그 내용이 무겁거나 매우 사적이라서 냉정하게 대처하기가 힘들다. 청자는 청취와 이해, 위로를 강요당한다. 배려심이 많고 순진하게 상대방을 믿으려는 사람일수록 이런 관계에 노출되기 쉽다. 당연히 양쪽 모두의 존엄은 훼손된다.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솔직하려고 취한 행동이 타인의 존엄을 훼손하게 된 이유는 뭘까. '품위 있는 고백'은 어떤 절차를 밟아야 가능할까. 적어도 나에게 일방적 폭로를 반복했던 사람들 중에 그 관계에 충실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그 배설 같은 고백의 시간을 탕진하고 나면 또 다른 고백의 대상을 찾는다.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기보다는 본질에 다가가는 척에 중독된 것이다. 결국 진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이 모든 고백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존재의 변화는 관계 속에서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 일이 반복되다 보면 일방적 폭로의 당사자가 폭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은밀함이 파괴 당하는 것이다. 자기 보호를 위해 선택한 삶의 관습은 스스로를 위협하는 무기가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용기가 결여된 은밀함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과 친밀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신을 얼마나 보여주고 누구에게 보여줄지 스스로가 자유로의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자유 안에 존엄성이 있다. 은밀함을 존중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과 같다.

본문 중


어떤 사람에게는 누가 알았을 때 완전히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한 도덕적 문제가 있을 수 도 있겠다. 그런 경우 우리는 드러난 현상만을 문제 삼고 고민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드러난 문제는 본질과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떤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그 문제는 본질적인 다른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에 불과하다.  어떤 사건에 대한 수치심으로 주장하고 있는 그 문제는 사실 자기의 약함에 대한 수치심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은 약할 리 없고 약하다는 것은 용납될 리 없다는 두려움은 거짓을 생산하는 에너지가 되어 존중돼야 할 진실한 자아를 잠식한다. 가장 약한 시기에 가장 약한 자아가 선택한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일생의 에너지를 탕진해 왔다면 그 자아는 더더욱 약해져서 수치심을 가리기에 급급하게 된다. 이것은 '용기 없는 은밀함'이다. 두려움의 증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거짓 없이 친밀감을 공유하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들였다면 상대방은 수치심에 대한 나의 고백의 시도를 적어도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내가 나 아닌 상대의 존엄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


자기 존엄을 찾기 위해 수치심을 드러내고 한 가지 인격으로 살기로 결심했다면 내가 문제 삼는 그 문제의 본질을 함께 들여다볼 사람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친밀함이라는 감정을 공유할 자격을 얻으려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이야기든 해도 된다는 표현을 했는지, 나는 상대와 친밀함을 나눌 정도의 시간 또는 신뢰를 쌓았는지 난 상대의 마음을 얻겠다는 욕망 때문에 또 다른 거짓말로 다른 함정을 파고 있지는 않았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러이러해야 사랑받을 것이고 용납받을 것이라는 상상에 갇히면 솔직한 자아의 친밀한 교류는 성사되지 못한다.  


소중한 사람의 고백은 믿음의 표현이고 자기 존엄을 지키고 싶어 하는 우리 소망의 실체다. 나의 존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거듭거듭 확인해야 한다. 나는 상대방의 존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 상대방의 존엄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일방적 폭로는 용기 있는 고백으로 변할 것이다.  이런 인식 가운데 진행된 성찰과 표현만이 존재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는 글로써 자유를 얻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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