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서 TV를 켜고 첫 끼니를 준비하는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나온다. 가수 겸 텔런트였던 가방 사업가 임상아에 이어 주부 출신 사업가 한경희가 나온다. 둘 다 엄청난 사업가로서의 모습이 나온 후 '평범한 주부로 돌아가는 그녀'라는 표현과 함께 가정에서 좋은 여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게 한 것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조명된다
얼마 전에 어떤 페북 페이지에서 훌륭한 남편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는데 일하고 돌아온 아내가 저녁식사로 준비한 빵이 탔고 그것을 먹은 남편이 '난 탄 빵이 좋아'라고 말해서 배려심 넘치고 멋지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남자 만날 거야~류의 댓글이 많았다. 또 어떤 날은 아이가 복통에 시달려서 어느 날 물통을 열어봤더니 패킹에 오물이 끼어있었고 그걸 관리하고서 아이가 건강해졌다는 내용이 포스팅됐다 댓글에는 엄마가 제정신이냐는 내용이 줄을 이었다.
어제 노명우 교수의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으로 책담을 나누며 참 많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절차적으로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밟아왔던 길을 차근차근 밟으며 살아가는 삶에는 엄청난 고통과 갈등이 수반된다. 아마도 엄마라면 아빠라면 아들이나 딸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굳건한 '일반화된 타자'의 무게가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다른 삶'은 더 나을 거라고...
혼자 충분히 살아보지 않고서는 혼자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절대 모른다 그 삶의 일반화된 타자는 아직 안정적으로 구축되지 않아서 멋대로 해석되고 재단되고 추측된다 자유롭겠다 외롭겠다 힘들겠다 화려하겠다 우중충하겠다.부럽다 불쌍하다 눈이 높다 순진하다 현실성이 없다... 이 많은 말들로부터 자아를 지켜내는 방법은 자기 밀도를 높이고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 노명우 교수는 관계 밀도(관계 속에서 주체에게 기대되는 역할의 무게)가 높을수록 자기 밀도는 낮아진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점점 많아지는 다양한 형식의 1인 가구 가장들에게 아직 일반화된 타자가 없어서 기준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로 묶였지만 너무나 다양한 새로운 형식의 묶음이다. 소수가 아님에도 소수로 인식되는 이유는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주류문화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문화는 함부로 부러워함으로써 우리의 노고를 비하하거나 함부로 연민함으로써 우리의 주체성을 말살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가지 역할 기대로 설명하기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커플 또는 가족을 전재하지 않은 삶의 형식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가족역할 중 어느 하나만 선택해서 최적화시킨 후 나머지를 버리는 사람도 있고 모든 역할을 나누어하며 슈퍼파워를 발휘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 순간순간 모드 선택을 한다 모든 역할을 발달시키고 깊이 체험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돈을 벌어오는 가장, 지금은 가정주부 지금은 나의 친구...
일을 하느라 연락을 못할 수도 있는 것, 쉬는 날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것, 설거지하기 싫은 것, 운동도 귀찮은 것 다 당연한 일이 됐다. 어떤 날은 정말 폐인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떤 날은 퇴근 후 옷도 못 갈아입고 새벽까지 집안일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행여 아픈 날은 모든 모드가 작동 불능이라 속수무책으로 회복을 기다렸다. 반려자는 물론이고 조력자 없이 가구를 꾸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잘하기는커녕 버티는 것이 용했다. 한 가정의 부모가 느끼는 죄책감은 부당하다. '더 잘한다'는 압박은 애초에 정리해야 하는 단어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뼛속 깊이 깨닫게 된 것은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이 될 수 없고 타인의 역할을 해 본 사람만이 양쪽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신중함으로 말하건대 주부라는 존재의 숭고함 없이 사회 기반 자체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난 나의 엄마의 삶을 착취했고 그분이 무언가를 포기한 덕분에 삶을 얻었다. 최대한 기대지 않고 독립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는 '고향의식'없이 '독립의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속감을 전제하고 난 많은 것으로부터 독립했다.
한 가정을 이끌 만큼 돈을 벌면서 동시에 가정을 꾸리는 것은 절대 당연한 수준의 삶이 아니다. 하나를 선택하라면 돈을 버는 쪽을 택하겠다. 그것이 편하진 않지만 더 안정적이고 가시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림을 싫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주부로서 나를 돌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그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주부의 삶을 절대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끝도 없고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숙련돼야 하고 비가시적이다.(주부는 고연봉의 전문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가족이 주부에게 또는 돈을 벌며 식탁을 차리는 가족에게 매 순간 감사하다고 인정의 말을 해줄까.
예전의 나였다면 여성을 다룬 다큐를 보며 주부 역할까지 하니 훌륭하다 말하고 곰팡이 슨 물병을 보며 엄마만 탓하고 탄 빵 포스팅을 보며 이런 남편을 만나야지 했을 것이다. 일반화된 타자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그것을 인식조차 못할 때가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나는 다른 형식의 삶을 10년간 꾸려 봤고 다른 필터링과 안경을 탑재하게 됐다.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했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누군가에겐 아무렇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게 돼버렸다.
성공한 남자 사업가의 다큐에 아빠로서의 죄책감을 본 적이 없다. 물병 관리는 아빠도 같이 해야 한다. 같이 일을 하다 돌아왔으면 빵을 사가지고 오거나 남자도 빵을 구웠어야 한다. 불평 안 했다고 훌륭해지다니... 그리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존재한다 아직 소수일 뿐(아닌 줄 알았는데 아직은 소수다...)
이 책에서 제일 처음에 짚고 넘어가는 것을 나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1인 가구는 미혼 남녀로만 구성돼 있지 않다 이혼 가정, 배우자 사망, 떨어져 사는 가족 등 다양한 이유로 독신자 가족이 늘고 있고 미국은 50퍼센트가 넘었고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40 퍼센트가 넘었다 대한민국도 35년에는 전체 인구의 34퍼센트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혼을 안 한 이기적인 청춘이 많아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다양한 이유로 1인 가구가 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다수의 1인 가구로 구성된 국민들과 끓임 없이 소통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행복한 나라를 꾸려가고 있다. 이전의 일반화된 타자들이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다면 개선해 나가고 새로운 일반화된 타자가 구축되고 있다면 인정하면서 굴러가야 자기 밀도가 높은 개인의 연합인 '사회'가 유지될 것이다.
책담 말미에 나는 내가 새로운 일반화된 타자가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상대방들은 그 발언에 놀란 눈치였다. 사실 새로운 일반화된 타자는 역사이래 매 순간 만들어지고 있다. 그들이 의식하지 못했을 뿐... 다만 나는 그것을 의식하고 싶을 뿐이다. 방법이 없지 않나 다른 삶은 지금의 형식이 아닌 것을... 기준에 맞추는 것도 기준을 만드는 것도 힘들긴 매한가지고 난 후자를 택했다. 평범하고 화려하지 않은 단독자로서의 독립된 삶의 기준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