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가 불편하다
64세 공직자를 고소한 그녀를 위해
외상 반응은 행동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못할 때 발생한다. 저항이나 탈출이 불가능해질 때 인간의 자기 방어 체계는 압도당하고 와해된다. 위험 속에서 인간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 요소들은 그 유용성을 잃게 되고, 실제 위험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형되고 과장된 상태로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외상 사건은 생리적 각성, 정서, 인지, 그리고 기억 속에 뿌리 깊고 지속적인 변화를 발생시킨다. 더 나아가, 외상 사건은 건강하게 통홥됐던 기능들을 뿔뿔이 잘라낼 수 있다.
<트라우마>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정치에 의해 좌우됐다. 외상 장애는 구조적 약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고 권력자에 의해 발생하는 병이니 구조적 가해자가 솔선수범하여 그 병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소수의 과학자와 의사가 그것을 아무리 밝혀내도 권력을 나눠 가진 조직과 사회는 그것을 부정하고 발화자의 입을 막고 억압했다. 인권과 사랑과 자비를 외치는 철학 자와 종교인 정치가들 모두 대부분 그래 왔고 아주 소수만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치유해야 하는 대상으로써 다루는 이 싸움의 명맥을 이어왔다.
최초의 연구는 여성에게만 나타난다는 인식으로 명명된 히스테리아 연구. 이 증상이 가정 내의 여아에 대한 성추행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최초로 알아내고 문서화한 사람이 프로이트이지만 그는 발언 즉시 소외됐고 그것은 그를 위축시키고 두려움에 떨게 했다. 프로이트는 이후 히스테리아가 남성의 성폭력에 의한 것임을 알면서도 외면했고 남성 중심의 정신 분석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당시 유럽은 반여성주의적 정치 풍토가 만연했었다. 이후 - 대화 치료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 환자 안나 오는 그의 치료자 브로이어에게 버림받았다. 브로이러는 유일하게 남은 히스테리아 초기 연구자였다. 차기 치유자를 찾아주지도 않고 돌연 치료를 중단했다. 이후 안나 오는 병원에 입원됐고 남성의 성폭력에 의한 상처를 인정받지 못한 채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안나 오는 베르타 파펜하임이란 이름으로 당당히 여성의 인권을 위한 삶을 불꽃처럼 살았다. <여성의 권리를 위한 변명>을 번역했고 <여성의 권리>를 연극으로 창작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그녀에게 '열정적인 영혼'을 가진 운동가이자 여성 생존자라고 말했다.
'영혼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둘을 다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중 가장 드문 것이 열정적인 영혼이다.' - 마르틴 부버
브로이어의 버려진 환자 안나 오는 이후 죽지 않고 살아서 여성에게 권리가 있고 그들을 짓밟은 성착취의 역사가 있음을 함구하지 않고 욕먹으며 계속해서 말한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불리했던 시절 외상 장애는 연구되지 못했다. 이후 다시 외상 장애가 문제가 된 것은 1차 대전 당시였다. 하지면 역시 권력은 약자의 편이 아니었다. 참전 용사들이 겪는 전쟁 외상 신경증은 '도덕적 결함' '인간적 나약함'으로 낙인찍혔고 아무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왜? 정치와 권력이 그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모든 군사의학은 환자를 전쟁터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진행됐다. 많은 상담이 여성을 길들이려 진행됐듯이... 권력 없는 남성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또다시 이 문제가 떠오른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였다. 똑같은 문제를 겪는 환자들이 많아졌다. 역시 정치권은 관심이 없었다. 인류학과 정신분석을 모두 공부한 카디너만이 이 문제를 히스테리아와 같은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고 그는 히스테리아라는 용어 자체의 경멸적 의미가 환자를 낙인찍는다는 것도 문제시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극도의 불안에 오래 '노출'되면 외상 후 스트레스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전투의 장기적인 심리적 영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베트남 전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것은 정치와 권력이 아닌 재향군인회 즉 전우들이었다. 환자들이 전쟁터에서 견딜 수 있게 만든 유일한 힘이 '관계' 즉 전우애라는 것이 확인됐다. 그들을 보호해 주는 장치는 사기와 리더십, 동료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런 장치를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의 정신은 망가져 버렸고 지속적으로 고통받았고 이후 각종 중독과 심리적 문제를 안고 살아야 했다. 이들에게 힘을 준 것은 정부가 아니었다. 동료였다.
19세기 후반에야 발견되어 정치적 흐름에 의해 자맥질을 해야 했던 트라우마 연구는 이런 역사를 거쳐서야 전쟁을 치른 남성이 많아지고서야 그것도 같은 편인 남성들에 의해 인정되었고 이후에야 '전쟁 수행 중인 남성이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더 일반적이라는 것이 1970년 대 여성 운동을 만나서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
'여성의 침묵은 성과 가정 내의 어떠한 착취도 합법적인 것으로 둔갑시켰다.'
<트라우마> 주디스 허먼
압도적인 권력에 의해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동료 없이 지속적인 공포에 노출되면 지속적이고 치명적인 상처를 받는다. 그들을 그 상황에서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연대와 격려가 만든 권력욕 없는 힘이다. 온정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은 없다. 역사이래 단 한 번도 주도 권력이 앞서서 피해자의 권력을 피해자 희생 없이 보호해 준 적은 없다. 남성들조차 권력이 없으면 약자다. 그들은 '문명화된 우리가 합법적 살인에 내몰렸다.'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원망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약자의 사적인 삶은 권력자의 공적인 삶과 절대 분리되지 못한다.
강자의 사적인 감정으로 약자의 공적인 권리를 짓밟지 말라. 우리는 절대로 질 생각이 없고 정치 놀음에 장단 맞출 생각이 없다. 19세기 말 지적인, 권력 있는 남성들이 명백한 다수 여성의 증언을 묵살한 것은 가정 내 성폭행이 너무나 일반적이란 것을 수면 위에 띄울 용기가 없어서였지 부성을 존중하는 예의 때문이 아니었다. 1차 2차 세계 대전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인간의 정신을 망가뜨린 다음에도 권력자들은 그것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비하했다.
인간의 사적 자유는 언제나 정치의 영향을 받는다. 경계를 넘나드는 논리로 물타기를 하는 것은 이미 너무나 익숙한 전략이라 새롭지도 않다. 그들에게 다수의 지지자가 있는 것도 상관없다. 100년이 걸려도 변할 것은 변한다. 내가 그 완성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너무 슬프지만 할 수 없다.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프로이트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날 불편하게 할 것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동료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사람이 죽었는데'라며 우리 입을 막지 말라.
그녀는 용기 있게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