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이지 않으면서 쓰는 고달픔에 대한 나의 다짐
학원에서 일할 때, 나의 밥벌이용 업무시간은 공식적으로 주 11시간이었다. 상담과 행정적 업무시간, 수업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독서와 사색 글쓰기 시간을 제외하긴 했다. 사실 삶 전체가 수업에 녹아드니까 분리시키긴 힘들다...
얼마 전부터 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에 대해 많이 생각해왔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난 사랑에 빠진 듯 이 일을 참 좋아했다. 남자 친구보다도 일이 좋았다. 거의 항상 그랬고 많은 날들이 쌓였다. 그리고 이제 그 시대가 가고 있다.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이유는 지금의 삶이 싫어져서가 아니라 다른 것이 더 좋아졌기 때문인가 보다.
예전엔 아니었는데 요즘엔 생각에 빠져들고 글을 쓰는 일이 좋아졌다. 그 일에 몰두할 시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진다. 이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원함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다. 원래 나는 글쓰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때는 그것을 어떤 '결과물'로서만 인식했었다. 난 그 '결과물로서의 글쓰기'를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다.
몇 년 전 누군가를 통해 책을 써 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들은 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어떤 결과물을 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글을 써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나에게 글이라는 건 쓸 수 있을 때 쓰는 것이지 쓰고 싶다고 쓰는 것이 아니었다. 애를 쓴다고 글이 써지진 않았다. 그래서 책 쓰기를 진행할 수 없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무엇보다도 나에겐 여전히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했고 즐거웠다.
그래서 난 그냥 내 일상을 열심히 살았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거나, 긴 산책을 하거나, 떠올리는 것 자체가 괴로울 정도로 힘든 일을 당하거나 하는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가끔 어떤 생각에 휩싸이면 그에 이끌려 춤을 추듯 글을 통해 흘려보냈다. 글이 나를 도구로 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따라만 가는 그 행위조차 수련이 필요했다. 마치... 신과 인간 사이에 노련한 영매가 있듯 생각과 세상사이에서 자기를 비워낸 메신저가 되는 기분... 글쓰기는 결과물이 아니었다. 글쓰기는 과정이었다. 있는지조차 몰랐던 나를 만나는 과정,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던 어떤 목소리를 듣는 과정, 다시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과정, 파편화된 생각들을 엮어내는 과정... 그 과정을 거친 후엔 노래를 한 곡 완창 한 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무도 안 읽는 글을 쓰다가도 가끔 나는 그 생각을 외면하거나 바쁘게 일을 하며 나를 차단했다. 완전히 벗어난 듯 책도 안 읽고 생각도 안 하고 쓰는 것도 중단하면 잠과 휴식을 얻고 사유의 이끌림은 잠잠해졌다. 그것을 다시 부르는 주문을 알면서도 읊조리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는 글에 사로잡힌 상태가 익숙해질수록,
내가 점점 고독해져 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글을 쓸수록 점점 지향점 없는 그리움이 쌓였다. 예전엔 익숙하고 당연하고 즐거웠던 시간들이 지루해져 갔다. 나만 밟아본 어떤 땅을 기억하는 탓에 늘 마음이 정착하지 못했다. 나만 들어본 음악에 취해 다른 소리는 시시하게 들렸다. 모모가 카시오페이아를 따라갔다가 들은 음악이 그런 거였다. '소유하면 파멸에 이르게 하는 보물...' 기기와 베포에게도 들려주지 않고서는 이제 그들과 함께할 수가 없게 된 상태.
독서수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래서인 것 같다. 소통되지 않는 자리에서 내 귀에만 들리는 음악을 들으며 침묵에 질식하느니 음정과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숨을 쉬며 살려고. 그러니까 그곳이 내 꿈이고 직업은 밥벌이다 밥벌이 때문에 일을 열심히 했고 일을 하다 보니 어떤 음악을 들었고 그 음악을 다른 사람과 듣기 위해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두 공간의 융합과 분리가 반복됐다. 어느 날 아예 분리되는 날이 와야 한다면 난 내 귀에 음악소리를 들려주는 쪽으로 가고 싶다.
너는 그 일을 잘 하잖아
재능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게 된 거 아니야?
부러워 난 잘 하는 게 없어서
난 꿈이 없어서 난 가치 있는 일을 못 찾아서 ~~~
흔히 들어왔던 들을 때마다 불편했던 말이다. 난 천부적 재능으로 자연스럽게 잘 하게 된 재주로 어느 영역에 가서 손쉽게 위치를 점한 적이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바닥부터 박 박기는 길고 지루한 일상이 있었다. 처음부터 잘했거나 재능이 보여 그 길을 갔을 거라는 것은 타인의 상상일 뿐이다. 누군가가 의미 있는 삶을 살든말든 상관없지만 본인의 선택을 핑계 대는데 소비되고 싶지는 않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의 그레고리우스에게 마음의 울림을 따라갈 일탈이 가능했던 것은 오랜 시간 성실하게 쌓아온 일상의 지겨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버리고 떠나는 것은 성실했던 사람만의 특권이다. 집적거리다 말면서 끝없이 반복하는 회피의 일상을 핑계 대고 싶어서 굳이 누군가의 '지겨운 일상'을 '화려한 출세'로 미화하는 것은 칭송이 아니다.
내 귀에만 들리던 음악을 함께들을 사람은 누구일까? 적어도 누군가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성급한 칭송과 부당한 부러움보다는 수련하며 쌓아온 시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손뼉 칠 때와 경청할 때와 추임새를 넣을 때를 구분 못하는 청중은 합주자가 될 수 없고 그 이전에 좋은 청중도 되지 못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소리는 합주다. 각자에게 가장 좋은 것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소리인 상태의 지속... 그렇다면 몰입된 자아도 고독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글을 쓰고 글을 읽으며 자아의 눈을 통해 타인을 보고 타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남이 보아주는 나도 없어져 버린다. 일정한 시간 동안 필요했던 고독이 결국 연대를 위한 것임을 확인한다면 거절할 사람에 대한 엄격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지켜야만 하는 존재라고 자꾸만 되뇔 필요가 있다. 어설픈 겸손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비겁한 안전과 공허한 친절의 늪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스스로 고독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연대할 수 있을까? 칭찬과 부러움에 도취되는 건 자기를 지우고 타인에 의해 자기를 쓰는 것과 같다. 이것은 중독된다.
나를 쓰는 것은
엄격한 나 자신이어야 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 연주라 해도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라 해도 몸이 아닌 상태의 나를 낳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없는 곳에 무형의 나를 있게 함으로써 더 많은 합주자를 만날 장소가 생긴다. 그곳에서의 연주는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내가 모르는 소리라서 타인과 나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만날 수 있고 직접 대면하지 않기에 좀 더 용기 낼 수 있다. 내가 낳았지만 그 글은 내가 아니며 그 글이 맺은 관계는 내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동시에 그 글은 내가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타인이 아닌 내가 썼다는 말은 그런 의미이다. 나이면서 내가 아니고 더 넓은 책임의 필요로 나를 성장시킨다.
기대에 떠밀려 빚어낸 문장들은 예쁜 쓰레기만큼 무의미하다. 하지만 스스로 써낸 문장의 맛이 얼마나 썼는지를 안다면 방종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자중할 수 있을 것이다. 쓴맛 없이 쓴 문장은 곧 독이 될 테니까... 낯설지만 분명히 나의 모습인 어떤 문장들을 통해 만남과 헤어짐이 이루어지고 관찰과 선택, 거부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난 다행으로 여긴다. 더 자유로워지자. 더 쓴 맛을 추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