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1 ㅡ 향수와 중독
... 어떻게 헤어졌어요?
네?
만나시던 분이랑은...
저쪽이 그냥 잠수 탔어요. 날 위해서라는 강한 확신으로.
헤어지기가 정말 힘들었던 사람에 대한 얘기였다. 말하면서 참 아무렇지도 않고 무덤덤했다. 헤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고 믿었던 관계인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런 것을 '관계'라고 부를 수나 있었나 싶다.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는 (아니 나는)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냥 관계가 주는 안정감에 취했고 전통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경로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만족했던 것 같다. 서로의 내밀한 생각이나 존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한 없이 많은 날들이 있을 거란 가정이 나를 여유롭게 했고 그렇게 여유를 부릴 만큼 관계에 대한 내 의지는 굳건했다. 나는 (나를 잘 아니까...)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를 믿는 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상대방에 대한 내 근거 없는 믿음과 확신은 문제였다.
가끔 생각해 보려 애쓴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정말 조금도 기억이 안 난다. 이런 공허를
나는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인가.
나의 일상에 흩뿌려 있던 공허한 여백을 그가 모두 채운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나의 삶을 완전히 다른 색으로 물들여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은 그의 능력일까 나의 의지일까. 그것이 누구의 업적이었든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사건이었다. 누군가에겐 허락되고 누군가에겐 비껴가는 인연이 내게도 몇 번 있었을 뿐, 연애라는 건 내가 예쁘거나 못 생기거나 똑똑하거나 가난하거나 멍청해서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 연애의 발생은 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상대에 대해선 의문만 남고 종결될 때가 많다.
연애는 나를 배우는 과정이지
상대를 아는 과정이 아니다.
내가 그에게 주는 신뢰는 실존과 상관없는 환상이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기만적 존재인지 알았을까. 욕망으로 눌러버린 양심이 '너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정말 못 들었을까. 몇 번이고 생각해봐도 난 그의 진의를 모르겠다. 명확한 것은 이것이다. 그는 그의 입장에서 결백하다. 그는 본인이 자기 자신보다 날 사랑한다고 착각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착각인 지 몰랐으니까... 그 착각을 내가 믿은 것은 내 실수와 어리석음 때문이다. 지나갔다.
본인이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 구원자라니... 이보다 끔찍한 재앙이 있을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랑은 세상에 없다. 누군가가 자기 자신보다 날 사랑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나를 향한 내 사랑보다 클 수는 없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자기애를 이김으로써 남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코 상대방의 자기애를 넘어서지는 못함을 인정하는 것. 그럼으로써 - 나의 불안이나 불만과 상관없이 -남의 사랑을 믿게 되는 것. 겸허한 이기심...
사랑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데도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딱한 자아였다. 놀랍게도 그는 스스로를 건사하기도 벅찬 사람이었다. 그런 수준이면서 감히 구원자의 향기를 풍풍 풍기며 날 유혹했다. 그것은 그의 체취가 아니라 향수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겐 무거운 독이었고 금단 증세는 끔찍했다. 싸구려 향수를 씻어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못난 자신을 너무나 인식하는 사람만이 지나치게 '좋아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극복한 것이 아니라 잠복해 있었을 뿐 난 무언가에 쉽게 빠지는 중독 체질의 약해빠진 중생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난 그런 싸구려 향수에 넋을 잃었을까. 두통과 호흡곤란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싸구려 향수로 도배했던 것인지를... 문제는 그의 치장이 아니었다. 눈치채지 못한 나의 싸구려 취향이 문제였다.
난 나로부터 풍기는 체취가 누군가에겐 욕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몰랐고 내 향기의 존재를 모르니 제어할 줄 몰랐다. 그가 나를 구원했다면 난 나를 다시 구원해야 했을 거다.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은 향기로 충만한 나를... 구원은 채움이 아님 발견으로부터 온다. 나를 알게 된 것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사건. 자기 인식 없이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
나를 위해 헤어진다는, 언어가 될 수 없는 단어의 조합에 아주 오랫동안 분노했다. 날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한다고 믿는 것도 원하지 않는 봉사활동을 할 수 없어서 차라리 상처 주겠다는 그 위대한 이기주의도 다 소름 끼치게 싫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주체적 자아임을 모르는 그 멍청한 머리가 혐오스러웠다. 나를 사랑함에 있어서 본인이 절대 나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면 조금 덜 한심 했을 텐데...
사랑의 진실함은 이별의 순간 증명된다. 사라짐으로써 성립되는 이별은 폭력일 뿐이다. 난 멍청한 믿음에 쉽게 빠지는 나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무엇을 발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