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s 독서일기 8 -1 <삶의 격> 페터 비에리
일기의 형식은 바뀌겠지만 <삶의 격>을 읽으며 나에 대한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주체적 결단을 한 중요한 시기, 관계의 흔들림 속에 혼란스러운 상황, 공동체 전체의 존엄이 무너진 사회... 참 공부하기 좋은 삼박자다.
나는 나를 존중하며 살고 있는걸까? 이제 겨우 38쪽을 읽었다. 생각할 지점이 참 많다. 그리고 어차피 완전히 새로운 책은 없다. 존엄한 삶은 생존과 맞닿아 있다. 난, 호랑이와 태평양 사이에 놓인 파이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과 유사함을 느낀다.
궁리... 궁리끝에 존엄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겹게 한가닥 자긍으로 희미한 목소리를 붙든다. 가끔은 자기 혐오가 존엄을 지킨다. '내가 미워하는 나'는 버려야 하는 존재인 것인지 존엄을 지키는 삶의 형식을 통해 연구해 본다. 이건 궁여지책이다. 생존 앞에선 궁여지책이 최선이다.
존엄을 침해한 '것'의 주체가 무엇인지 건조하게 알아야겠다.
피하지 않고 버리고 싶다.
서문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존엄성을 논하려면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존엄성 있는 생활방식은 매끈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주체되기
나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곳까지도 자기 인식의 영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권력 갖기, 후견인 노릇
우리는 우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너그러움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정식 요구 또는 소송등을 통해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존엄은 충분히 지켜진다. 때로 우리가 모르는 일에 대해 후견인을 내세워야 할 때가 있는데 '후견인적 성격을 띤 법률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투명하게 유지될 때만이 존엄성이 보장될 수 있다. '
후견인에게 권리를 양도하는 것은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국가의 경우 여러가지로 국민을 일깨우는 방법을 통해 투명하게 양도된 권리를 유지 또는 행사할 수 있다.
'일깨움이란, 문제에 따르는 모든 가능한 해답을 앞에 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적절한 것을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도록 준비시키거나 발생 가능한 모든 장해요소를 그려봄으로써 스스로 해답을 찾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 빌헬름 폰 훔볼트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면 이 모든 상황이 근본적으로 권리 양도에 대한 국민적 교양의 부재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왜 우리의 권리에 대해 주장하지 않았을까. 왜 분노를 느끼기만 하고 그 표현 방법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선택하지 않았을까?
잘못된 순종의식과 질서 의식은 존엄성 자체를 증발 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야 할 때고 지금이야말로 아는 것이 지식에 그치지 않을 수 있는 적기임은 어찌보면 다행이기도 하다. 슬프지만 그리고 치가 떨리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희생을 통해 이 끔찍한 현실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여름마다 벌벌 떨게 되는 누진세 전기 요금, 매달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부당하게 책정된 의료보험료, 법적으로 사각지대인 개인사업자들이 직면한 세금폭탄의 현실, 갑작스런 담뱃값 인상, 넌 나라의 국격이 떨어짐으로서 국민인 내가 감당해야 할 수치심.... 이 모든 것이 '직접' 겪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과정을 통해 눈을 떠야 하고 감시해야 하는지 국가는 의도적으로 감춰왔고 그것은 법률적 후견인의 의무인 '일깨움'의 작업을 소홀히 한 것이다. 법률적 후견인은 정치인, 교육가, 언론인, FC 등등 다양하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든 후견인으로서 누군가의 존엄과 관련된 권리 양도를 받은 상황이라면 스스로 생각하여 해답을 찾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일깨움의 의무'를 소홀히 하면 안 되며 권리를 양도한 주체는 늘 이에 대한 감시자 역할에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권리를 양도한 존재가 존엄성을 지키는 방법이다.
종속 : 부탁과 구걸, 감정구걸,
내적 독립 : 생각하기.
필자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종속된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구걸'의 비참함에 대한 설명을 한다. 우리가 누군가와 종속 관계에 있을 때, 우리의 이해관계가 누군가의 권위에 속해 있을 때, 상대방이 어떤 방법으로든 의도성을 가지고 우리의 무력감을 비웃고 조롱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나의 감정의 근원을 살피고 표출할 감정의 모습을 선택하고 지휘하지 않으면 아무리 의연하거나 근엄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저항해봤자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한다.
나는 나의 감정을 지휘하고 있는가?
상대가 나에게 취하는 태도에 권력의 과시와 비웃음의 의도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단계를 우리는 거치고 있을까. 무조건 나의 욕구에만 집중되어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상대의 욕구만 채워주는 '구걸의 역사'를 쓰고 있지는 않는가? 애원, 분노, 감정에 대한 호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존엄을 지켜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다.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자기 힘과 요구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존엄은 권력 (감정의 권력도 포함된다.)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주체의 행동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는지 고려돼야 한다.
'내면의 독립적 존엄성은 그것이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목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부단한 노력에 있다'
<삶의 격>
내적 독립 : 의지와 결정, 감정적 동요, 자아상과 검열
페터 비에리는 <자기 결정>에서 시간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다. 우리가 내적 독립을 이루려면 미래에 묶인 결정이 아닌 현재에 집중된 결정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예측, 특히 두려움에 휘둘려 한 결정은 나를 억압하거나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어떤 것에 중독되며 그 중독의 대상이 사람일 경우 더더욱 독립적으로 행동하거나 판단하는 것에 실패하곤 한다.
'나 자신과의 심리적 일치감을 주는 어떤 감정에 대한 용기. 그것이 존엄성인 것이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지만 결국 '자기 인식의 결여'는 우리의 지식을 무용하게 만든다. 나 자신의 심리적 상태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내 감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필자가 제안하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이 새로운 자아인지 교육된 자아인지 일단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엄격한 내적 검열의 주체가 교육된 의존성이 아닌 스스로 결정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나를 막아서는 것, 나를 멈추게 하는 것, 나를 나아가게 하는 것이 타인의 의지가 아닌 내가 결정한 자아였을 때 우리는 존엄을 지킬 수 있다.
사랑받고 싶거나 어떤 위치에 오르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자신과 일치되지 않은 선택의 자리에 있게 될 때 내적 독립성은 침해 된다. 사랑 받는다고 믿는 현실이 사실은 비웃음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늘 존엄의 삶을 굳건히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것은 규칙이 아닌 삶의 형태이다. 내가 어떤 태도로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사람의 존엄성은, 내면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모래성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심으로부터 인간사이의 연대감이라는 값진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삶의 격>
어제 내가 존엄을 지키는 선택을 하지 못하여 자기혐오를 느꼈다면 돌아보고 관찰하고 선택하여 오늘은 다른 나를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삶의 형태는 전도된다. 내가 믿는 것은 그것이다. 변할 수 있다. 전도된다...
이 책 1장에 놀라운 구절이 있다.
'완전무결한 굴욕에게 통째로 다 삼켜지는 와중에도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내가 원하는 것과 영도자가 원하는 것에 아무 차이가 없어서 영도자가 내게 굴욕을 주고 무력감을 선사하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의 격>
이것은 특정인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이런 상태를 특이한 경우로 떼어버리면 우리는 성찰의 기회를 놓친다. 어떤 문화 속에서 조직 속에서 또는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고 믿는 친밀한 집단이나 가족, 연인, 친구관계 속에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난다. 심지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조차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의심해야 한다. 나의 안락함은 진정 자기 결정을 거친 것인지. 존엄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인지... 독립하지 않은 자아의 행복은 의심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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