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글
나는 피곤하면 눈알이 돌아간다. 면접 준비를 하려고 계속 영상을 찍는데, 자꾸 눈이 피곤한지 흰자가 희번뜩하게 카메라를 위협했다. 그래서 차마 못봐주겠어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삭제했다. 잠시 눈을 식힌 뒤 다시 영상을 찍기 위해 알람을 30분 맞혀두고 침대에 누웠다. 아예 불도 끌까 싶었으나 그려면 못 일어날까봐 불을 켜고 대신 이불을 덮었다. 여기는 호텔이다. 스터디 하려고 나는 서울에 상경했고 홍대의 어느 호텔에 있고 낯설고 이 상황이 스트레스다. 부장님한테는 업무 전화가 오고 나는 자꾸 글을 써야한다는 책임감이 들고 자꾸 카톡이 온다. 새벽에는 전화 스터디가 있고 밤에도 전화 스터디가 있다. 왜 나는 자꾸 고생을 사서 할까 싶고 인생 회의감이 드는데 이건 다 내가 자초한 짓이긴 하다. 내가 호텔을 잡았고 내가 스터디를 만들었고 내가 낯선 곳에서 벌벌 떨며 수업실연을 연습하기로 했고 내가 글을 써야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것 뿐이다.
월요일부터 차근차근 한 문단씩만 썼어도 됐을텐데 - 라는 생각은 매 달 해온 생각이다. 사람은 일정이 닥치면 그 일을 처리하게 되어있고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글쓰는 게 좋다. 글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음악을 틀어놓고 술을 홀짝이며 글을 써왔다. 그 시간 대가 가장 행복했다. 그런데 나는 호텔에서 눈을 감고 잠깐 잠을 자려다 괜히 똥줄이 타 글을 쓰고 있다. 내 술과 새벽과 감성을 빼앗겼다. 그 누구도 빼앗지 않았는데 나는 빼앗겼다.
인생은 사계절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겨울은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였다. 또한, 이 겨울이 지나면 또 다른 겨울이 올 것만도 같았다. 마치 이 눈보라가 가면 더 심각한 눈폭풍이 온 마을 집어 삼키는, 그런 차갑고 시린 것.
어제는, 아니 정확히는 오늘 새벽에 이 호텔에서 꿈을 꿨다.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니는 꿈이었다. 나는 수치스러웠는데 옷을 입을 생각도 못했다. 아마 새벽에 추웠나보다. 말이 안된다. 호텔이 춥다니. 내가 무슨 동네 여관을 잡은 것도 아니고.
생각 없이 사는 게 좋다는 말에 백번 동의한다. 생각이 없어야 행복하고 나름의 만족을 하게 된다. 나는 이 겨울이 싫어서 또다른 겨울을 선택하고 그 겨울에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불평쟁이 만렙답게 불평만 늘어놓다가 밤에 잠에 들 것이다.
후르츠 바스켓이라는 애니메이션 OST 중에 내 맘에 든 것이 하나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중학생 때부터 맘에 콕 들어서 자기 전마다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어떤 부분이 맘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나이가 들고 생각하건대, 가사가 좋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봄날은 아직도 멀어서 얼어붙은 땅 속에 웅크려, 싹이 틀 그 때를 기다려왔어- 대충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다는 그런 내용이다. 회의적인 어른이 된 나는 이 가사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인생이 사계절이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게 보장된다는 뜻이니.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을, 특히 겨울은 사람을 상념에 들게 하니 다들 사계절에 대한 철학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봄이 지나면 정말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게 맞나? 가을 다음은 겨울인가? 그건 누가 정하지? 누군가에게는 겨울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봄이지 않을까? 나는 여름을 가장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여름에 온갖 오명을 씌워가며 손가락질을 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