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혜 누나와의 행복한 만남
형아는 대입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라 밤늦게 귀가해요. 형아 얼굴 보기가 흐린 밤하늘에서 별 찾는 것만큼 어려워요. 형아는 늦게 들어와서 잠만 자고는 새벽 일찍 나갔으니까요. 밤늦게 귀가한 형아는 잠들기 전에 다정한 손길로 치를 어루만져 주긴 했지만 금세 잠들었어요. 그래도 형아와의 스킨십을 포기할 수 없어서 형아 곁에 누워서 형아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곤 합니다. 그래야 하루 일과가 끝난 것 같고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으니까요.
문득 누나와 형아가 하루씩 교대로 치리오를 데리고 자면서 보살폈던 시절이 떠올랐어요. 이제 치리오가 형아한테 똑같이 해줄 차례입니다. 하루 종일 공부하느라 지친 형아의 머리맡에서 킁킁거리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형아가 이 시기를 아무 탈없이 편안하게 넘기기를 바라면서요.
매일 밤 형아를 곁에서 지켜온 보람이 이런 걸까요? 승현 형아가 무사히 대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치에게 새로운 고민이 생겼어요. 가끔 아빠한테서 맡았던 냄새가 형아한테도 나기 시작했다는 거죠. 바로 술 냄새입니다. 학생회에서 맡은 직책으로 수험생 때랑 별반 다르지 않게 늦은 귀가의 연속이었죠. 치리오는 고약한 술 냄새를 싫어했어요. 그래도 한밤중 용변을 보고 형아 방으로 가봅니다. 술 먹고 다음날 아침이면 머리가 아프다며 괴로워하면서도 또 술입니다. 술 안 마시면 대학 생활이 안 되는 걸까요. 이제 치리오가 형아 걱정을 합니다.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형아 곁에서 킁킁거립니다. 건강엔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을 멈출 수가 없네요. 형아의 도톰한 손등과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치리오도 까무룩 잠이 듭니다.
형아가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 며칠간 술 냄새 없이 멀쩡하게 귀가했습니다. 새벽마다 달리기를 시작했고 주말에는 조기축구도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술 냄새가 싹 달아났습니다. 옛날 형아 냄새를 되찾았어요. 건강한 형아의 살과 땀 냄새가 납니다. 치리오가 좋아하는 냄새죠. 며칠 동안 치리오에게 긴 산책도 시켜줍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저녁식사도 자주 하고요. 치리오만큼 엄마 아빠도 안심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다 또 술 마시는 날이 이어지긴 했지만요. 그래도 가족이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어느 날 형아가 여자친구 다혜 누나를 가족에게 소개했어요. 누나를 마주 보는 순간 치리오는 알아버렸죠. 누나의 눈빛이야말로 사랑의 눈빛이라는 걸요. 반짝이는 별 같았죠. 햇살같이 포근한 미소는 눈이 부셨죠. 치리오를 향해 다가와서 희고 작은 손으로 감싸주는 모습은 한마디로 천사였어요. 승아 누나만큼 예뻤죠. 승아 누나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기분이었어요. 다혜 누나가 그냥 좋았어요. 다혜 누나가 심심한 치리오를 위해 자주 놀러 왔으면 좋겠어요. 엄마와 아빠도 다혜 누나를 좋아했어요. 우리 가족이 됐으면 좋겠어요. 치리오 마음을 눈빛으로 간절하게 전했는데 눈치챘을까요? 다혜 누나가 자주 놀러 오는 거 보면 치리오의 마음이 전달된 게 분명합니다.
처음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흔한 일은 아니죠. 다혜 누나에게 단번에 빠져든 이유를 알았어요. 누나는 이미 반려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려견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죠.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죠. 그 영혼을 치리오는 단번에 알아본 겁니다.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냥 알아지는 거예요.
다혜 누나는 휴일에 자주 놀러 왔어요. 치리오랑 재미있게 놀아주고 산책도 함께 했죠. 산책 후 발을 씻겨주면서 간질임을 태웁니다. 누나는 웃는 모습도 예뻐요. 거실에서 잠든 누나 곁을 지키다가 치리오도 깜빡 잠들었어요. 형아가 그러는데 다혜 누나와 자는 모습이 똑같아서 한참을 웃었다고 하더라고요. 사진을 보여줬는데 치리오가 봐도 웃음이 났어요. 활개를 펴고 대자로 누워있는 모습이 정말 데칼코마니였으니까요. 다혜 누나가 웃고 있는 치리오를 더 포근하게 안아주었어요.
치리오는 여전히 잘 달려요. 그래도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있어서 예전에 비해 빨리 달릴 수는 없죠. 그래도 주말이면 엄마와 아빠랑 북한산 둘레길을 길게 산책합니다. 주변 노견들을 보면 치리오만큼 가볍게 산책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죠.
북한산 둘레길 중간에 엄마와 아빠가 쉬어가는 지점이 있어요. 멋진 전망으로 유명한 곳이라 주말에는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아요. 엄마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로 한가한 시간에 산책을 나서요. 준비해 간 커피를 아빠와 나눠마시며 치에게는 방울토마토와 삶은 감자를 간식으로 줍니다. 행복한 순간이죠. 서쪽 마을이라 석양이 지는 광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요. 노을 앞에 앉아있는 세 가족의 뒷모습은 상상 속에서도 아름답지 않나요?
산책을 마치고 귀가해서 치를 씻겨주는 엄마의 손길은 사랑입니다. 개운하게 씻고 나서 먹는 간식은 언제나 두부 한쪽과 계란 노른자죠. 맛나게 먹고 꿀잠 자는 시간도 행복입니다. 긴 산책을 다녀오면 언제나 마음을 담아 눈빛으로 말하죠.
- 엄마 아빠, 고마워요.
요즘 짧은 산책은 주로 아빠랑 하는 편이에요. 실외 배변하는 치리오 때문에 아빠가 오랫동안 힘들었을 거예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빠는 치리오 용변 훈련을 제대로 시켰어야 하는데 오히려 치리오가 아빠를 훈련시킨다며 어이없어합니다.
주중에는 가족을 위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엄마와 함께 마트에 가서 장도 봐옵니다. 거기에 치리오 용변까지 책임져주는 아빠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귀는 활짝 열려있고 말씀은 꼭 필요할 때만 하는 진중한 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치리오의 눈빛 언어를 누구보다 빨리 읽을 줄 압니다.
보통 하루 네다섯 번 용변 산책을 나가는 편인데요. 물이나 우유, 과일을 많이 섭취한 날이면 여섯일곱 번 산책을 나가야 해요. 용변이 목적인 오분 내외의 외출이니까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죠. 그래도 바깥바람 쐬는 건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치리오에겐 비타민이자 청량음료 같은 시간이랍니다.
강아지들도 우울증에 걸린다는 걸 아나요? 우울증 예방에 산책은 큰 도움이 됩니다. 햇볕을 쐬어 주면 세로토닌이 분비되니까요. 사람이랑 똑같아요. 추운 겨울에도 짧게 여러 번 산책하는 게 중요해요. 치리오가 아는 게 많다고요? 치리오는 들은 것은 흘려버리지 않거든요. 얼마 전 엄마랑 티브이에서 봤어요. 전문가들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였죠. 티브이를 끄며 엄마가 말했죠.
-- 아. 우울이 밀려오네. 햇볕을 쐐야 해. 치! 산책할까?
- 네. 엄마, 당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