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속에서는 침묵이 대화

무박 일일 주량, 우리도 시도해 볼까요?

by 물들래

이른 아침, 가족이 모두 집을 떠난 뒤 유미도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서두를 이유가 없는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연 생각에 마음이 헛헛해질 때의 증상이랄까. 춘천으로 향했다. 이십여 년 전 이연과 걸었던 H대 캠퍼스 주변을 산책하다가 L작가의 작업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 오래전, 이연과 함께 L 작가의 집필실을 방문했던 때는 아쉽게도 작가가 집필실로 막 들어간 뒤였다. 한 번 들어가면 오랜 기간 칩거하는 작가였다. 집필실 앞을 지키던 사 년 차 문하생 그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휴식이 필요해 보였던 그린을 데리고 가까운 바로 이동했다. 독일스러운 분위기로 연출된 공간은 붉은 조명 때문일까. 알코올을 삼키기도 전에 취하게 만들어버렸다. 유미와 그린에게 하이볼을 권한 이연은 운전 때문에 커피를 주문했다. 조명과 어울리는 볼륨감 있는 곡들로 실내가 촘촘하게 채워졌다. 싱거웠던 하이볼과 사약 같은 검은 커피, 그 안에 채워진 적당한 소음 속에서 무박 삼일 주량을 자랑하던 L 작가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 선배, 언제 무박 삼일 주량, 우리도 한 번 시도해 볼까요?


-- 그럴까? 재밌겠는걸요. 주량은 각기 다를 테니 난 그저 홀짝거리며 분위기와 대화를 즐기고 싶네요.


듣고만 있던 그린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여러 해 전에 술 깨나 마신다는 친구들과 무박 삼일 주량 시도했다가 필름 끊겼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 뒤로 알코올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자신은 확실히 술과 친밀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걸 혹독하게 깨달았다며 재미로 해볼 일은 결코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밤을 잊고 음주하고 싶다던 이연의 마음과 막막하고 외로워 보이던 옆모습이 조화롭지 않게 오버랩됐다.


막연하게 소리 없이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일어섰다. 어김없이 해 질 녘이었다. 공지천 어린이 회관 앞뜰에서 석양녘을 맞이했다. 호수에 드리운 노을이 잠수하고 청색에서 보라색으로 옮겨가다가 완전한 어둠이 깔리는 시간까지 침묵한 채 공지천에 시선을 던졌다. 빛이 아름다운 노을 속에서는 침묵이 대화였다. 이후의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셋이지만 어느 순간 혼자인 것 같은 시간을 유미는 좋아했다. 셋 모두 그 시간이 어떤 건지 알고 있었다. 나란히 서있지만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다. 처연하게 잦아드는 노을과 일체 되는 순간의 자유를 마음에 품은 채. 각자의 정서는 그때 어떤 빛을 발했을까. 비슷한 결로 겹쳤을까. 완전히 달랐을까.


차돌같이 단단한 이미지의 그린과 헤어져서 어두운 경춘 가도를 달렸다. 과속으로 첫 과태료 딱지를 끊게 됐다며 깔깔거리던 이연, 그날 스피드를 즐기던 이연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그날 이미 이연 마음속엔 어떤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던 거다.


독서모임 야간비행에서 무박 일일 주량을 체험하기로 했다. 해 질 녘에 일인 일주를 준비해서 서쪽 마을 유미네로 모여들었다. 흐린 회색과 주홍 사이로 얇은 선을 그은듯한 분홍이 겹친 석양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체험은 시작됐다. 다양한 술이 준비됐다. 와인에서부터, 코냑, 소주, 맥주, 위스키, 동동주까지. 한두 잔씩 마시며 영화 사랑이 남다른 멤버의 제안에 따라 게임을 시작했다. 화이트보드에 영화 제목을 자음으로 써서 맞추는 게임이었다.


<ㅌㅇㅇ ㄱㄷㅎ>


비교적 짧은 시간이 흐린 뒤에 K가 정답을 외쳤다.


-- 태양은 가득히


<ㅅㅇ ㅇㅇㄱ>


유미가 낸 자음 퀴즈였다. 유미의 인생 영화 중 한편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이처럼 설득력 있게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던 영화였다. 관람한 친구들이 적었던 걸까.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정답이 나왔다. 정답을 외친 건 이연이었다.


-- 사월 이야기!


이연은 이 영화를 언제 관람했을까. 한 번도 이 영화에 대해 나눠본 적이 없었는데. 영화 한 편으로 두세 시간 대화도 부족한 두 사람, 러닝타임 67분짜리 영화 <사월 이야기>는 어쩌면 1박 2일 얘기해도 시간이 부족할지 모른다. 짧은 영화였지만 사랑에 대해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가 펼쳐질 게 분명했으니까. 유미가 혼자 생각에 빠져있을 때 이연이 자음 퀴즈를 냈고 여럿이 함께 외쳤다.


-- 뽕!!


이연이 화이트보드에 쓴 자음은 하나였다.


<ㅃ>


동시에 정답을 맞힌 몇 사람, 낸 사람, 야간비행 멤버 모두 빵 터지게 한순간이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영화 자음 퀴즈에 빠져들고 있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영화가 속속들이 등장했다. 동시에 술세상으로 깊이 빠져드는 친구들도 보였다. 무박이 아무래도 힘들 수도 있겠다 싶을 때 이연이 영화 제목 자음을 쓰기 시작했다.


<ㅁㅈㅁ ㅅㄹ>


쓰는 순간 제목을 알았지만 유미는 반응하지 않았다. 왠지 유미에게 건네는 메시지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술에 취한 친구도 있었고, 의외로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본인이 관람한 영화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정답을 외치지 못했다. 누가 손을 들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저 씁쓸한 마음으로 영화 제목을 되뇌었을 뿐이니까.


마. 지. 막. 사. 랑.


너무 강렬한 영화여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아프리카 북동부의 모로코 항구 탕헤르가 스크린을 채우고 있었고 금빛 사막이 오래도록 시야를 흐리게 했다. 데브라 윙거 출연작을 하나둘 찾아보기 시작했던 영화였다.


멤버들은 영화와 책이 바탕이 되어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툭툭 던졌다. 웃다가 울다가 징징대다가 남편 흉보다가 자식 자랑하다가 아직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가정에 좀 더 기여할 때라고 하다가 그래도 야간비행 인문학 모임이 자신을 잃지 않게 붙들어주고 있다고 하다가 오래도록 모임이 유지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무박 일일 주량 모임은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았다. 술이 조금씩 과해지면서 감정이 격하게 표출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좀 전까지 들리던 이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연은 무박을 포기한 채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얇은 모포를 덮어주며 바라본 이연의 얼굴은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지만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문득 우리는 인생의 어느 부분도 먼저 선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서도 마찬가지다. 뭔가 일어나고 벌어져야 알게 되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무엇이 닥쳐올지가 관건이다. 일어난 그 일 앞에서의 선택과 표출될 정서는 각자 몫이다.


석양.jpg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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