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과 유미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by 물들래

종종 한두 달씩 여행을 떠나는 유미가 부럽다던 이연. 그런 이연에게 짧게라도 여행 계획을 세워보면 어떠냐고 했다. 이연은 진지하고 낮은 음색으로 한 번 비행기를 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유미는 이연을 바라보며 하이톤으로 웃었지만, 순간 마음이 차가워졌다. 농담으로 치부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차차 이연, 너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깨달음이 있고 얼마 안 돼서, 이연은 정말 돌아오지 않을 비행기를 탔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이연, 네 빈자리는 점점 커졌고 네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은 태산처럼 쌓여갔다. 무엇보다 절실히 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이연! 바이칼 호수에서 석양을 마주했던 시간을 뭐라고 표현할까. 개와 늑대의 시간을 제대로 실감했지. 숙소에서부터 어슬렁거리며 따라온 개가 언덕으로 오르던 모습은 영락없이 늑대였지. 숙소로 돌아와서 곧바로 엽서를 쓴다. 돌아가서 개가 늑대로 변하는 순간을 담은 사진을 보여줄게. 너의 반응이 무척 궁금해. 알혼섬에서 유미가.>


엽서를 보낸 뒤로 이연을 만나지 못했다. 아마 유미가 이르쿠츠크발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고 있던 그즈음 이연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리라.


이십 년이 지난 늦가을 유미가 직접 뮌헨으로 향했다. 그녀의 정착지가 뮌헨이란 건 그녀와 나눴던 대화로 유추할 수 있었다. 전혜린의 발자취를 따라 뮌헨이란 도시를 찾을 거라던 이연, 미루나무 가로수가 멋진 슈바빙 거리를 따라 뮌헨대 캠퍼스를 걷다가 해 질 녘이면 영국 정원을 산책하고 싶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던 이연이었다.


영국 정원으로 향한 발걸음은 오늘로 엿새째다. 드넓은 영국 정원 어디쯤에서 이연과 만날 수 있을까? 전혜린의 글 속에 그 장소가 숨어있지 않을까. 중국 탑 주변이거나, 혜린의 단골 카페 제로제이거나, 슈바빙 혹은 레오폴드 거리쯤이지 않을까. 그곳이 어디든 이연과 함께한 무수한 낙조 시간 어디쯤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뮌헨대 캠퍼스를 걷다가 보라색으로 치장한 카페 LOST WEEK END 앞에 섰다. 연보랏빛 플레어스커트를 즐겨 입던 이연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했다. 이연은 어쩌면 이곳 단골일 수도 있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이연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 조바심이 났다. 슈바빙과 레오폴드 하얀 거인 조각상을 지나 영국 정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후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모딜리아니 작품 속 여인을 찾았다.


서쪽 하늘엔 벌써 오렌지빛 구름이 어리기 시작했다.


중국 탑 앞에 당도했다. 무수히 많은 다국적인 사이에서 이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종일 걸어도 다 못 걸을 것 같은 영국 정원을 얼마나 걸었던가. 청보라색 어둠이 깔릴 즈음 카페 제로제에 들어섰다. 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야외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전혜린’의 시절부터 있었던 터줏대감이 직접 서빙해 준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찼다. 두 모금째 들이켜며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영국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 저 실루엣, 한 여인이 아득한 조명을 등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움직임이 내 쪽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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