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에서의 시간을 복기했다. 아침 7시 20분에 숙소를 나와 에노덴 경전철 원데이패스 구입, IC 카드 충전 완료하고 전철 탑승. 가장 앞자리에서 기관사와 전경을 참관하다 재잘거리는 초딩들을 만났다. 각 역마다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7명이 종알거리는데 그 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짧은 영상에 담았다.
종점인 가마쿠라 역에 하차, 재잘거리던 초딩들의 뒷모습을 기념으로 남기고... 역사를 벗어나 벚꽃 만개한 노란색 건물 앞에 섰다. 입구 현수막을 보니까 다이쇼 13년, 오랜 역사를 간직한 호텔이었다. 당시 문단의 꽃이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머문 장소여서 더 반가웠다.
여기서부터 엔카쿠지까지는 도보로 40분. 공기 좋은 철길 따라 걷는데 새들의 합창과 옹기종기 모인 다람쥐, 초등학생 자녀 등교 시키는 엄마, 자전거 앞뒤로 아이를 태워서 등교시키는 아빠 등. 아이들과 걷다가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상냥한 학부모들. 부모와 함께인 아이들 표정은 맑고 밝았으나, 혼자 등교하는 아이들은 우울해 보였다. 가기 싫은 학교에 억지로 가는 듯해서 안쓰러웠다.
고즈넉한 주택가를 걷고 있노라니 이런 동네에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졌다. 한 달 쉴 수 있다면 가마쿠라에 가고 싶다고 했던 H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가마쿠라 역에 내린 순간 공감할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택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속에 있는 사찰이구나 싶었다.
어느 골목길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산소리]에 등장한 주인공의 집 앞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떠올랐다. 계단을 오르면 왠지 엔카쿠지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산길을 한참 오르니 다시 내리막길이었다.
건널목을 건넌 후 2차선 도로 옆 좁은 인도를 따라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사실 가마쿠라역에서 엔카쿠지행 전철로 환승하면 편하게 갈 수도 있지만 가마쿠라를 직접 걸으면서 느껴보고 싶었다.
엔카쿠지 도착하니, 사찰로 오르는 계단을 쓸던 승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4월 이맘때 자연색을 가장 좋아하는데 일본의 4월은 뭔가 좀 더 부드러운 파스텔톤을 띠고 있었다.
경내를 오르다 그맘때 피는 꽃들을 많이 만났다. 겹철쭉인가 싶어서 검색했더니 만병초라는 화초였다. 초롱꽃처럼 생겼는데 하얀 꽃잎 끝에 녹색 점이 찍혀있는 레우코줌(스노플레이크)은 피레네산맥에서 루마니아와 서러시아에 이르는 유럽 중남부가 원산지였다.
일종의 템플스테이 공간일까? 수행자들을 위한 전문 도장 '고지린'에서의 시간이 좋았다. 개방된 공간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천우학]의 배경지이자, 나쓰메 소세키가 심신을 수양한 장소이기도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처럼 태어나 이처럼 목숨을 부지하고
지금 살아있는 이것이야말로 불심
여래 무량의 생명 감사하게 손을 모은다. - 엔카쿠지 브로슈어
국보로 지정된 범종 '오가네'는 1282년 세워져 현재까지도 세월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사찰 엔카쿠지 중앙의 계단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국보이자 관동 지역의 가장 큰 범종 오가네는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창건 당시부터 유지되고 있는 연못과 정원에는 산책로가 있어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범종 '오가네'를 만나고 나면 엔카쿠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찰 내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카레라이스를 먹을 수 있다. 10박 11일 여행 동안 유일하게 남긴 한 장의 인물 사진은 여기서 식사를 마치고 마주한 산을 바라보는 나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어준 일본인 젊은 부부는 내가 자리를 일어서자 먼저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다. 화답했다. "사요나라!"
맛있는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마음을 안듯 코끝에 커피 향이 날렸다. 눈앞에 펼쳐진 로스터링 전문 카페 VERVE ROASTERY COFFEE!
내 커피 취향을 묻더니 GETA BORE 에티오피아 커피를 추천했다.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한국인 같은 재퍼니즈가 서비스 만점 자세로 응대했다. 부서지듯 상냥한 미소는 또 어떻고. 고마운 일이다. 이런 친절이. 사람을 이리도 기분 좋게 만드니 말이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찾은 공간은 가나가와 현립 근대미술관, 2층 전시관을 둘러보고 야외 조각 공원을 산책했다. 현대 미술품 전시라 난해했으나 자기만의 느낌으로 이해하고 관람하면 되는 거다. 전시를 둘러본 소감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지금의 나로 잘 사는 것! 오늘 지금 여기에서 순간을 사는 것!' 4월의 녹색이 내 귓가에 대고 살랑살랑 속삭였다.
다음으로 들린 곳은 기대한 만큼 만족스러웠던 공간, 가마쿠라 가와키타 영화 박물관이었다. 가와키타 부부가 거주했던 가마쿠라시의 영화 문화에 이바지하는 것이 박물관의 목적이라는데...
박물관은 특별 전시회, 영화 상영, 워크숍 및 영화 서적이나 잡지 도서관을 조직하여 영화 및 예술 커뮤니티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박물관 건물은 세련된 동네와 잘 어울렸다. 건물은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목재 블록 외관의 원래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고, 자료관 넓은 창으로 바라보는 일본식 정원이 아름답다. 충분한 다리 쉼을 할 수 있을 만큼 한적한 공간이 흡족했다.
가와키타 부부는 영화야말로 국경을 넘어 이해와 우정을 키울 수 있는 최고의 매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 믿음을 추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20년대부터 수십 년 동안 영화로 문화를 이어왔으며, 해외의 걸작을 일본에, 뛰어난 일본 영화를 해외에 소개했다. 그들의 업적과 영화에 대한 큰 애정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7월 27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서는 전후 일본의 영화 산업과 함께 걸으며 혁신적인 노력으로 영화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Modern Film Company의 작품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었다.
코마치 거리를 걸었다. 여행객들이 가득 찬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맛있는 팥빵을 먹고, 녹차 시음하고, 걷다 보니 철길 건널목이다. 철길을 건너니 이른 아침엔 닫힌 상가들이 모두 영업을 하고 있었다.
야채가게만 보면 기분 좋아지는 난 야채 가게에 들어섰다. 야채가게 부부에게 한 母子가 다가서며 학교 과제로 여러 직업에 대해 조사하는데 인터뷰에 응해달라고 하자, 주인 부부는 아이의 질문에 정성스레 답했다.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가마쿠라 역에서 다시 경전철을 이용해서 <바다마을 다이어리> 속 카페(마고코로)에 안착했다. '가마쿠라 와인' 주문 후, 영화 속 커플이 앉았던 자리가 비어 있기에 그곳에 앉아 바다 멍하다가 거센 파도 속에서도 불구하고 서핑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조용하던 카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가 빠지고 다시 채워지길 반복하는 동안 내내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가마쿠라 해변은 소세키의 [마음] 속 나와 선생님이 만난 장소고, [슬램덩크] 영화의 명장면이 등장했던 해변이었고, [바다마을 다이어리]에서 네 자매가 뛰놀던 장소다. 그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이동했다. 바람이 불었고, 흑사가 날렸고, 다국적인이 오갔다.
가마쿠라 밤거리를 걸으며 작중 인물 '신고'를 생각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년 작품 <산소리>의 문장이 신고의 입을 빌려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요전 날 밤에 덧문을 열고 바람을 쐬고 있는데 산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서 말이지."
"언젠가 어머님께 들은 적이 있어요. 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산이 울리는 것을 들으셨다고." (……)
"요즘 머릿속이 매우 멍해져서 해바라기를 보아도 머리만 생각나. 저 꽃처럼 머리가 맑아질 수 없을까? 아까 전철 안에서도 머리만 세탁하거나 수선을 맡길 수 없을지 생각했어. 머리를 싹둑 자른다고 하면 거칠긴 하지만, 머리를 잠깐 몸통에서 떼어내 세탁물처럼 '자, 이걸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며 대학 병원에 맡길 수 없을까? 병원에서 뇌를 씻어내거나 나쁜 곳을 수선하는 동안 사흘이든 일주일이든 몸통은 푹 자는 거야. 뒤척이지도 않고 꿈도 꾸지 않으면서 말이지." -- 작중 인물 신고와 며느리 기쿠코의 대화
산소리를 통해 죽음을 떠올리던 그의 퇴근길, 가마쿠라 역에 하차한 그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했을까. 좌측일까. 우측일까. 퇴근길 우연히 며느리와 만났던 비슷한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밤거린 조금씩 더 짙은 어둠이 깔렸고 인적도 뜸해졌다.
더 깊은 어둠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고 영업이 끝난 코마치 거리로 다시 들어섰다. 번잡하던 낮 시간과는 대조적으로 텅 빈 거리였다. 복작거리던 공간을 몇 시간 전에 걸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한 도시의 낮과 밤풍경을 만나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난 그런 여행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에노시마 이후 두 번째 맛본 스라시동은 첫 번째 집보다 더 맛있었고, 세트로 나온 바삭한 전갱이 튀김도 풍미를 더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사과 한쪽이 먹고 싶었다.
사과 구입을 위해 키노쿠니야 마트에 들렀다. 4알에 1,500엔. 한 알을 세척해서 산책하며 한입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다. 앞으로 며칠간 아침마다 사과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할 듯. 오늘 일정 모두가 흠잡을 데 없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