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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Apr 16. 2023

아름답다,

정녕 그때 그 순간

이른 오후 무사히 마날리에 도착했다. 예정에 없던 도시 '마날리'였으나 이곳에서 1박 2일을 머무는 동안 충분히 행복했다. 


바쉬쉿 쪽 전망 좋은 방은 이미 만실이라서 반대쪽 방을 잡긴 했지만 온수도 나오고 그런대로 하루 쉬어가기는 괜찮은 방이었다. 1박에 Rs 200.


마날리에서의 오후 일정은 점심 식사로 선택한 씨즐러와 야채 볶음밥으로 시작했다. 식사 도중, 얼마나 많은 파리떼들이 식탁으로 몰려들던지 한 손으로는 연신 파리들을 쫓아내며 겨우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사실 이곳에서 뿐 아니라, 인도의 웬만한 음식점에서는 식탁에 우리 모녀 둘만 있지 않았다. 대부분 파리 여러 마리가 함께 식탁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식사 후, 오트 릭샤를 타고 시내버스정거장으로 향했다. 잘못 예약한 버스를 취소할 겸, 마날리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Rs 100의 취소 수수료를 지급하고 델리행 슈퍼 디럭스 버스로 재예약(1인당 Rs 565) 했다.


중심가를 잠시 돌아보고 달콤한 복숭아와 바나나를 구입해서 돌아왔다. 숙소에서 루트를 재검토한 후, 메일도 확인할 겸 PC방을 찾아 거리로 나섰다. 우리 모녀는 또 그곳에서 미술교사 L 씨를 만났다. 루트가 겹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엄청 느린 인터넷을 한 시간가량 하고 거리를 산책했다. 거리 카페에서 직접 갈아주는 파인애플 주스를 주문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밍밍한 맛에 실망스러웠다. 


서울을 떠난 후, 가족과 주로 메일을 주고받다가 통화(2003년 당시 마날리 1분당 통화료 Rs 60) 했다. 룸메와 아들의 반가운 음성을 보름 만에 들었다. 서울의 부자도, 인도의 모녀도 무사하게 잘 지내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니 서로가 안심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숙소에 돌아오니 피곤이 밀려왔다. 뜨거운 물을 받아서 두 발을 담그고 침대에 누웠다. 온몸이 나른해져 왔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이쯤에서 편히 쉬는 게 좋을 듯싶었다.

다음날 오전, 카페 옥외 테라스 좌식 테이블에 편안한 쿠션에 기대앉아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그려왔던 녹색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쉬싯 녹음을 가슴에 품고 멍 때리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제대로 된 커피와 맛있는 케이크를 즐기며 은은한 음악에 온 마음을 내어주던 그 시간, 테이블 맞은편 입식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행객이 커피를 마시며 독서하던 풍경이 오래도록 내 시선을 부여잡았다.

아. 름. 답. 다.

정녕 그때 그 순간.


아름다운 조화의 완벽한 전형을 보고 있는 느낌을 감히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아, 진정 나는 지금 행복하구나.


카페 차양 귀퉁이에 걸어놓은 모빌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영롱했다. 물처럼 잔잔히 흐르던 음악이 그때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 눈물 몇 방울이 이유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의 이름은 기억 못 하지만 이곳 옥상에 위치해 있던 야외 카페가 하도 마음에 들어 숙소도 둘러보았는데 마음에 들었다. 다시 마날리를 찾게 되면 이 숙소에 머물고 싶었다. 이곳 게스트하우스의 명칭은 'Surbhi' 1박 전망 좋은 방 기준 Rs 350. 이 게스트하우스에 머문다면, 같은 건물에 있는 이 옥외 카페에서 식사를 해결하면 안성맞춤이지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제에 이어 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녹색이었던 주위는 온통 밝은 은회색으로 둘러싸이고 녹색 나무는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싱그런 미소를 띠고 있는 듯싶었다. 마날리의 오전 11시, 그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풍경이 사진처럼 생생하다. 


오후 두 시경 우리 모녀는 무거운 배낭을 챙겨서 델리로 향한 여정에 다시 올랐다. 오트 릭샤를 이용하지 않고 마날리 시내까지 걸어보기로 했다(소요시간 약 90분).


배낭을 메고 바쉬쉿에서 마날리 시내까지 내려가는 동안 은비의 모습은 정말 예뻤다. 아마 그 예쁜 모습은 젊음에서 발산되는 에너지 때문이겠지.


배낭을 메고 내려오며 길 위에서의 만났던 시간들이 우리 모녀에게 여행의 진미를 선사했던 것 같았다. 안개가 휘돌아 감으며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가 싶더니 이내 거센 비가 쏟아졌고, 다시 축축한 비가 걷히며 안개가 우리 둘레를 휘감아 도는가 하면 다시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곤 했다.


내겐 언제나 조금 무거운 듯싶었던 배낭이었지만, 은비는 여행 초기부터 아예 인도 여행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서 내 배낭보다 더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도 전혀 무겁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젊음'은 정말 큰 선물이었다.


시내로 내려오는 길에 부유한 시크교인 가족을 만났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웃으면서 기꺼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인도에서는 배가 어느 정도 나왔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곧 부의 상징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다.

자전거 릭샤를 끄는 사람치고 살찐 사람을 나는 거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크 교인들 중에 특히 부자가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상당히 여유 있게 사는 가족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들의 모습에선 어떤 여유가 감돌았다. 미소도 부드럽고, 걸음걸이도 자신감 넘쳐 보였다. 부유한 인도인들에게 사랑받는 휴양지이기도 한 마날리에서 휴가를 즐기는 이들의 여유 있는 모습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마날리 시내에 내려와 잠베와 타블라 악기를 파는 현지인에게 가격도 물어보고 인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악기 1순위인 타블라를 두들겨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두드릴 때의 소리는 아무래도 전문적인 타블라 연주자가 두드릴 때의 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영혼의 울림이 전혀 없이 공허했다. 


문득 암리차르, 불사의 연못에서 만났던 슬픈 구루의 눈빛이 떠올라 가슴이 쿵 내려앉았고, 그의 손끝에서 울려 퍼지던 타블라 음색이 귓전을 두드려댔다. 

촙스틱스, 바나나 라시가 특히 맛있었던 레스토랑이다. 음식도 깔끔했고, 주변에 데이트하는 현지 연인들이 제법 눈에 띄었던 장소. 손님이 나가면 테이블보를 곧바로 갈 정도로 깔끔하고 아늑했던 식당이었다. 서빙하는 남자들도 유니폼인 듯싶은 붉은 체크 남방을 통일해서 입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 옆엔 아주 귀여운 사내아기와 함께 휴가차 와서 점심 식사를 즐기고 있는 젊은 부부가 주문한 식탁이 우리 모녀의 식욕을 자극해 왔다. 먹고 있는 음식 이름이 무엇이며 맛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나름대로 영어로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메뉴판을 받아 들고 설명을 들은 대로 그 음식을 시켰더니 재료는 비슷했지만 그들의 음식이 촉촉한 거였다면 우리 식탁 앞에 등장한 그 음식은 튀김 종류였다.


그러나 어쩌랴. 먹어보니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맥주 한 병을 시켜서 오랜만에 맛보는 매운 고추 절임을 곁들여 튀김요리를 맛있게 즐겼다. 식사하면서, 내가 여러 번 행복하다는 표현을 했지 싶다. 은비는 라씨를 두 잔씩이나 시켜 먹을 정도로 그 집 라씨 맛에 반했다.


식당 밖 창으로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촙스틱스에서 식사를 마치고 델리로 향하는 탑승 시간이 될 때까지 이 층에 위치한 피시방에서 인터넷을 했는데 속도가 얼마나 느리던지. 거기에다 접속이 되는가 싶으면 정전, 금방 전기가 들어와서 다시 접속하다 몇 분 하다 보면 또 정전. 아무튼, 인도란 나라가 그랬다. 이제 서서히 적응이 돼가고 있었다.


이제 다시 끔찍하게 뜨거운 델리로 가서 무더위와 싸워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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