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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Apr 16. 2023

다시, 뉴델리

이 도시에서 우리 모녀는 왜 다투었을까.

마날리에서 꿀루까지의 도로를 어떻게 표현할까?


어둠이 내리기 전의 그 도로! 비유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경춘가도를 몇십 배로 확대해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도로를 달리며 또다시 대자연의 광활함과 경이로움, 아름다움을 느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서늘한 기온에 비까지 간간이 쏟아지고 있어 강을 끼고 있는 그곳 휴양지의 민낯은 사뭇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마날리에서 오후 5시 떠났던 버스는 밤새 달려 아침 여덟 시경 델리버스정거장에 도착했다.


거의 보름 만에 다시 찾은 뉴델리역 앞 파하르간지. 인도에 도착해서 처음 접한 뉴델리의 느낌과는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아마 보름간 인도의 다양한 문화에 나름대로 적응이 된 까닭인지 끔찍하게 괴로운 냄새와 지저분한 거리풍경, 그리고 복잡한 거리에서 수시로 부딪치는 행인들과의 마찰이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루트가 맞았던 일행과는 모두 헤어지고 이제 오롯이 우리 모녀만의 여행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시원섭섭한 기분이 이런 것일까? 함께였을 때도 좋았지만 우리 둘 만의 여행이 더 기대되는 건 왜일까? 앞으로 뭐든지 둘이서 결정하고 선택해서 헤쳐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흥미로운 여행이 펼쳐지리라.

인도에서의 첫 숙소 나브랑에서의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우리 모녀는 좀 비싸더라도 깔끔한 숙소를 찾았다. 파하르간지의 지저분한 골목길을 들어서서 오분쯤 걸었을까? 좌측에 하얀색 대리석이 반짝거리는 로열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띄었다. 숙박객 신발에 묻은 진흙을 입구에서 걸레를 들고 계속 닦고 있던 깡마른 현지인 청소부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로열 게스트하우스는 그 노동의 결과만큼 쾌적했고 시원했으며 서비스 역시 좋았다.


하룻밤을 묵는데 Rs 650로 비싸긴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숙소였다. 34일간의 인도여행 중 가장 깨끗했던 숙소로 꼽을 수 있는 장소였다. 딸에게 '예뻐요!'라는 한국말을 여러 번 구사하며 한국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던 지배인 아저씨의 후덕한 얼굴표정과 한국말을 배우려고 애쓰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 이, 삼, 사, 오....'


은비에게 그 아저씨는 한국말로 몇까지 세는 법을 배웠더라? 아무튼 침대시트도 깔끔했고, 침대 바로 위에 걸려있던 액자와 조명등도 제법 고급스러웠다.

여장을 푼 후 샤워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우리는 많은 도로가 모여있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출발점이 된다는 코넛 플레이스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샤워를 금방 끝내서 뽀송했던 우리 목덜미는 5분을 채 넘기지도 않았는데 끈적거리기 시작했고 쉴 새 없이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자전거릭샤를 불러서 가고 싶은 위치를 얘기했다. 커다랗고 선량한 눈빛의 릭샤꾼이 처음부터 수작을 부렸다. 된 발음 영어로 인사를 건네고 친밀한 척 수선을 떨었다. 느낌이 별로 안 좋았다. 역시나 우리의 목적지 코넛거리가 아닌 쇼핑장소가 즐비한 엉뚱한 장소에 내려놓고 처음에 얘기했던 요금보다 배가 넘게 요구했다.


우리도 질세라, 우리가 얘기했던 장소는 여기가 아니지 않으냐? 우리가 원했던 장소로 다시 데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이 남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인도말에 영어를 섞어가며 혼자서 계속 떠들어댔다. 짜증이 갑자기 밀려왔지만, 어쩌랴. 요금을 지불하고 우리 모녀는 무작정 걸었다. 릭샤꾼한테 정말 조롱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으면서 사기 치는 뻔뻔스러운 일부 사람들 때문에 속상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기에 끔찍하게 더운 날씨까지 한몫 더해서였을까? 괜히 별일 아닌 일로 딸아이와 잠시 거리에서 다투었다. 그러고는 거리를 두고 걷다가 어디선가에서 서로를 놓쳐버렸다.


걱정은 좀 됐지만 하는 수없지. 혼자서 걸어보자 하는 심산으로 제법 번화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혼자서 걸어 다니고 있노라니 수작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한테도 이러는데 은비에게는 오죽할까 싶었지만 잠시 은비에 대한 신경을 끄기로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서 열심히 상가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제법 고급스러운 상가에 인도전통가구와 수제품이 전시되어 있는 특산품점도 있었고 호텔, 레스토랑, 세련된 상점, 은행 및 항공회사와 영화관 등이 늘어서 있었다. 그 화려한 현장을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었지만 디지털카메라를 꺼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 나약하고 한심한 인간은 벌써부터 이 도시의 끈적거리고 후텁지근한 날씨에 넌더리를 치며 지쳐가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운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옥수수 하나를 사들고 한 알씩 뜯어먹으며 넓게 펼쳐진 사거리에 섰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부대끼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그렇게 마냥 서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을까?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숙소로 돌아가 씻고 침대에 편하게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마침 지나가는 자전거릭샤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딸아이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땀에 절은 채로 어슬렁 거리며 숙소 문을 밀고 들어오는 딸아일 보니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우리 모녀는 잠시 쉬다가 조금씩 어두워지는 파하르간지 거리로 나왔다. 환전을 한 후, 냉방시설이 빵빵한 <골드리젠시>란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거기서 매운 고추절임을 곁들인 볶음 국수와 탄두리 치킨, 맥주를 시켜서 먹고 마시며 한낮 뙤약볕 아래서의 불쾌하고 우울했던 기분을 날려버렸다.


골드리시 레스토랑만의 독특한 라이브 공연이 시작됐다. 인도의 전통악기 타블라와, 또 다른 타악기의 음색과 육성으로 직접 들려주었던 노래를 통해 마음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던 음악의 조화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맥주 몇 잔에 약간 취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음악이 전해주었던 미묘한 가슴속 울림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은비는 그때 내 마음속 빛깔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때 은비 마음속 빛깔을 언뜻 읽었던 것도 같은데... 그렇게 뉴델리에서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밤 열 시가 다 된 델리의 어두움에 익숙해질 무렵 숙소로 돌아와서 숙면을 취했다. 다시 내 꿈에 타고르가 찾아왔다.


"……… 덧없이 흘러가는  내 삶의 수많은 순간들에 영원이라는 각인을 새겨 놓았습니다. …… 그것들은 잊혀진 내 사소한 날들의 기쁘고 슬픈 기억들과 뒤섞여 먼지 속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여행의 순간들이 확고하게 각인돼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듯싶다가도 어느 순간 여러 정서와 어우러진 채 흩어져 버리던 순간들의 반복이 인도여행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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