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유배지이자 영랑의 마을
차를 달려 백련사로 향했다. 하룻밤을 보낸 강진 생태공원에서 3~4km 남짓 거리였다. 녹차밭과 동백꽃 숲이 제철엔 장관이겠다 싶을 정도로 조성이 잘 돼있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7미터쯤 되는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 동백은 2월부터 화봉을 머금고 초봄인 3월 초에 개화를 시작하여 3월 말에 낙화한다지만 11월에 방문했기에 동백꽃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짙푸른 초록의 동백잎이 어찌나 탐스럽게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지 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숲길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나무 사이로 수줍은 듯보여주던 아득한 바다 풍경과 하늘과 바다와 숲 어디쯤에서 불어오던 짭조름한 바람의 맛도 잊을 수 없었다.
동백나무를 즐길 때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사색하며 거니는 게 좋다. 붉은 동백꽃들이 뚝뚝 떨어진 붉은 숲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면 더욱 고요히 가슴으로 꽃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는 게 순리다. 동백꽃이 낙화하는 풍경을 만나진 못했어도 공간이 선물해 준 사색의 시간은 자연스레 즐길 수 있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오솔길은 혜장선사와 다산이 교류하던 사색의 공간이자 구도의 숲이었다. 후미진 바닷가 마을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청량제 같은 존재였으리라.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오솔길은 소통의 공간이었으리라.
보고 싶은 친구를 가진 기쁨과 친구를 찾아가는 길에서 느꼈을 행복을 감지하며 다산과 혜장의 발걸음 위에 내 발자국도 하나씩 남기며 걸었다. 두 사람이 우정을 쌓아나갔던 800여 미터 오솔길은 여행객인 내게도 아름다운 산책코스였다.
두 사람이 오갔을 그 길목 어디쯤에서 다산의 말을 곱씹었다. 스스로의 뜻을 잃지 않는 삶이 곧 나다운 삶이라 했던 다산의 말, 중심을 잡을 수 있다면 흔들려도 괜찮다던 교훈을 떠올리며 위로받았다. 때때로 경솔했고, 흔들리고 약해지던 내 모습을 경계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고 싫은 모습도, 사랑스럽고 미운 모습도 모두 나의 일부였음을 수용할 때 균형감을 잃지 않는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인지했다.
천일각 앞에 섰다.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을 지닌 천일각은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누각이다.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다산의 모습을 기리며 1975년에 세운 누각이라고 했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의 저술 활동과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집필했을 精進의 공간,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며,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했던 그의 간소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다산의 시간으로 가 보자.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작업에 참여했을 테고, 다산은 열정적으로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지도하고 독려했으리라. 한가할 때면 산책하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었을 것이 자명하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자 생산지였을 것이다.
다산초당의 제1경으로 알려진 정석(丁石)이란 글자는 다산이 바위에 직접 새겨 넣은 것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긴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가끔 유적지나 명소에 가면 여기저기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거나 적어놓은 것을 볼 때, 눈살을 찌푸리곤 했었는데 그 모든 게 어쩌면 다산의 영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혐오스러운 낙서가 아니라면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산책하고 둘러보면서 거대한 도서관을 탐색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일까. 그곳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아마 비슷한 정서를 느끼지 않았을까? 사유할 수 있는 공간, 활자와의 깊은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장소, 예상하지 못했던 통찰의 순간을 맛보게 되는 도서관에서의 시간과 흡사한 감동을 전달받았으니까. 백련사와 다산초당으로 이어졌던 서너 시간은 훌륭한 야외도서관 체험과도 같았다.
다산초당을 내려오는 길에 다산 회당을 마주했다. 1990년대에 왔을 땐 이 회당이 왜 눈에 띄지 않았던 걸까. 모를 일이다. 다산 회당은 1983년 고 조순 전 총리, 한승수 전 총리 등 다산을 흠모하는 회원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전통한옥건축물로 다산 선생의 애민·위민 정신을 연구하고 기리기 위해 조성된 이 회당은 현재 강진군의 자산으로 다산 박물관에서 관리한다고 했다.
회당에서 얼마쯤 내려왔을까? 멋진 나무 한 그루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처럼 나무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일까. '제 이름은 괴불나무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나무와 함께 서 있었다. 이유인즉 시도 때도 없이 너는 누구냐고 묻는 이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름표를 달고 있는데, 이름표를 보고도 인동초냐고 묻는 이가 있다니 안내문을 읽는 동안 웃음이 절로 났다. 어쨌든 초당골한옥 마당에서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던 이름표는 나무와 함께 꼿꼿하게 서 있었다.
다산초당 주차장에서 가까운 곳에 '초당 가는 길'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단호박 피자가 유명하다기에 시장하던 차에 먹고 갈까 했는데 재료 소진으로 주문이 마감됐다. 커피 향이 너무 좋아서 커피 한 잔 주문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맛있었다. 카페지기가 고맙게도 귤과 바나나를 건네줘서 커피와 함께 맛나게 먹었더니 시장기가 달아났다.
'대통령밥상'이란 식당에서 전라도식 식사를 제대로 즐기고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강진군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검색대에서 [정조가 묻고 다신이 답하다]와 [김영랑 시선]을 찾았다. 다행히 비치되어 있었다.
태평성대는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혼란에 빠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정조와 다산의 정책문답이라니... 2025년에 출판된 이 책은 정치인이나 지도자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었다.
기계가 망가지면 수리해야 하고 집이 무너지면 보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가의 폐단도 깁고 보수할 수 있는가.
55쪽 표현을 옮겨본다. 지금 우리 시대를 예상하고 말하는 것 같지만 어느 시대에 읽어도 적용되는 글일듯싶다.
별 특징 없이 무난한 도서관에 앉아서 잠시 책 속에 침잠해 들다가 강진군도서관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1965년 문화회관 자리에 개관해서 1986년 현재 도서관 본관을 준공했다. 무엇보다 강진군도서관은 전국 군립도서관 중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역사 깊은 도서관이었다.
개관이래 현재까지 폭넓은 장서를 구비하여 군민들의 정서함양에 기여하고 있으며, '책 읽는 군민'을 위해 다양한 독서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잘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2025년 여름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는데 흥미로운 독서프로그램이었을 듯싶다. 가끔 파주 책마을이나 동네 작은 서점에서 하룻밤 독서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기억이 났다. 몇 차례 참여하면서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어서 도서관에서의 하룻밤 프로그램이 더 반가웠다.
가족적으로, 친구들과 함께 어떤 형태로든 도서관에서 하룻의 추억을 쌓을 수 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시간제한 없이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책, 굳이 독서에 취미가 없더라도 책이 있는 공간에서의 시간은 멋진 추억으로 자리매김하지 않겠는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도서관만큼 좋은 공간이 있을까.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찾는 동안 어쩌면 모기에게 물렸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무더위와 가려움에 짜증이 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웃을 수 있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때 나눴을 대화를 기억할 수 있다면 먼 훗날 미소 짓게 만들지 않겠는가.
도서관 실내온도가 나와 맞지 않는 걸까. 계속 콧물이 흘렀고 재채기가 연거푸 나왔다. 왜 이러지? 김영랑의 시집에서 몇 편의 시를 읽는데 두통을 동반한 콧물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탈이 난 걸까? 으스스 춥기까지 했다. 여행 중에 감기라니 걱정이 됐다. 폐관시간에 나오려고 했는데 컨디션이 엉망이라 한 시간 앞당겨 퇴장했다. 이런 날은 콧물약과 타이레놀 챙겨 먹고 일찍 자는 게 상책이다.
약기운에 곧바로 숙면을 취해서일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콧물도 통증도 사라졌다. 가벼운 몸으로 강진생태공원 산책을 상쾌하게 마치고 영랑생가로 향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볕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영랑의 시어로 만든 동요를 흥얼거리며 생가 돌담 앞에 서니 아름드리 노란 은행나무가 햇볕을 받아 샘물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영랑의 시어를 읊조렸다. 시어 속 계절은 아니었지만 맑은 날씨와 꽤 조화로운 시어였다.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영랑 생가는 방문한 그날부터 리모델링 중이라 입장이 제한됐다.
생가 옆에 위치한 시 문학파 기념관에 들러 영랑의 시집을 읽었다. 특정 문학인에 한정치 않고 한 시대의 문예사조를 조망할 수 있는 문학공간이었다. 햇살 가득한 통창으로 돌담에 속삭이는 햇볕과 풀아래서 웃음 짓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기념관 앞뜰에 영랑, 용아, 정지용 3인 시인의 정다운 조형물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30여 년 전, 영랑 생가를 방문했을 때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내리던 찬란한 5월 초순 어느 날이었음이 기억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