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교육청 장흥도서관

한승원 이청준 이승우, 세 작가의 도시

by 물들래

화순에서 전남 장흥을 향해 달리다가 만난 강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유혹하는 물빛이었다. 바다 같은 강이었다. 수심이 얼마나 될까.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빛이 신비로웠다.


탐진강, 처음 접한 명칭이다. 총 55km인 탐진강은 장흥댐부터 장흥읍 중심을 지나 남해로 흘러가는 1 급수로 섬진강, 영산강을 포함한 전라남도의 3 대강중 하나다. 장흥읍 내 중심부를 흐르는 이 강은 여름이면 피라미와 은어가 떼 지어서 아이들과 함께 헤엄치며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아름다운 강으로 알려졌다.


여러 해 전, 장흥 표지판을 지나쳐 남해고속도로를 이용, 여수와 통영을 여행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장흥은 첫 방문이다. 이참에 갯벌 체험하듯 장흥의 속살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장흥을 대표하는 사찰, 장흥 9경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보림사는 차 향기 가득한 천년고찰로도 잘 알려졌다. 11월 초순의 보림사, 어느 계절보다 수려하고 화려한 경관으로 사찰 방문객 시선을 강탈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보림사 입구에 들어서자 ‘가지산 보림사’라고 쓰인 일주문이 우선 반겨주었다.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보림사는 전통 발효차인 청태전의 고향이다. 지금도 해마다 야생 차나무 잎으로 만든 엽전 모양의 청태전은 떡차의 일종으로 동전 모양과 비슷하고, 발효과정 중 청색으로 변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차의 고찰답게 절 뒤편에는 야생 차나무를 비롯해 사철 푸른 비자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숲 속 오솔길을 걷고 싶었으나 해 질 녘 임박해서 방문한 관계로 ‘청태전 티로드’ 입장이 제한됐다.


산산하게 불어대던 11월 바람에 나뭇잎 여러 장이 떨어져 사찰 경내에 날렸다. 방문객이 거의 빠져나가고 사위는 고즈넉했다. 이 정도면 됐다 싶게 휴식을 취하고 보림사에서 18km 떨어진 장흥도서관으로 향했다.


잘 정돈된 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2층 학습실에서 4시간 정도 머물 계획이다. 노트북과 몇 권의 책을 펼쳐놓아도 넉넉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책을 읽을까 생각하다가 장흥 하면 떠오르는 작가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 중 우선 한승원의 시집 한 권을 우선 읽고 싶었다. 검색대에서 찾으니 읽고 싶은 시집이 있었다. '황혼의 비낀 빛살 아래 집 한 채 지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서시가 수록된 시집이다. 다음날 방문했던 한승원 작가의 해산토굴 입구에도 '달 긷는 집'이란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서시 전문을 옮겨본다.


황혼의

비낀 빛살 아래

집 한 채 짓습니다.


전신주의 벌이줄 감으며 올라가는 하늘수박 덩굴이

타고 가는 소라고둥의 나선 같은

태극의 끝


그 시원의 숲 속

옹달샘에 빠져 있는 달

바가지로 길어가지고 히들거리며 암자로 달려왔다가

사라져버린 그 달 때문에 슬피 울다가 죽어간

스님,

대취하여 강물 속의 달 건지려다가 익사한

이태백을

기리는

달 긷는 집.


남도 바닷가 장흥은 작가 한승원의 고향인 동시에 소설 '낙지 같은 여자'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낙지 같은 여자’는 아주 오래전, 원작을 각색한 TV 드라마로 먼저 만났다. 찾아보니 1984년 가을 ‘MBC 베스트셀러 극장’ 단막극이었다. 모든 장면을 필름으로 찍던 시절이어서 영화만큼이나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알고 있다. 그 시절 KBS ‘TV문학관’과 함께 즐겨 챙겨보던 드라마였다.


신인 배우였던 송옥숙의 연기는 지금까지 기억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실성한 여자가 낙지를 질겅질겅 씹던 장면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생생했다. '연기 인생에서 운명처럼 다가왔던 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고 배우가 말할 정도였으니 시청자에게 깊이 각인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갯벌 밭 속에 웅크리고 있을 낙지일수록 어린것을 먹어야 한다고 했던가. 몸부림치는 낙지의 알토란 같은 머리부터 씹어야 제맛이 난다고 했던가, 짭짤한 듯 비린 올깃졸깃한 맛의 낙지를 바닷물에 헹구어 마파람 맞으며 자갈밭에 앉아 먹어야 한다던 묘사글을 읽었을 뿐이었는데도 입안 가득 낙지향이 번져왔다.


다시 자료실을 둘러보다가 이승우 작가가 독자에게 귓속말하듯 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소설가의 귓속말]이란 책이었다. 제목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제목은 중요하다. 마음을 단번에 훔친 제목과 표지가 독자의 시선을 강탈했으니까.


소설가 이승우의 책에서 그의 글이 아니라 작가가 인용한 카프카의 글이 먼저 눈에 띄었다. 워낙 유명해서 익히 알고 있던 화강암 문장이었지만 책 속에서 그 글을 다시 만나니 역시나 강렬했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단 말인가……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123쪽


책은 도끼여야 한다니,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여야 한다니. 두개골까지 깨야 한다니. 그토록 강렬한 독서를 한 적이 있던가. 오늘 내게 도끼 역할을 한 문장은 무엇이었나? 그런 강력한 문장을 매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두개골은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잠시 책장을 덮고 도서관 실내를 둘러보았다. 입장했을 때보다 이용객이 줄었다. 꽉 찬 실내도 좋았지만 여백이 감도는 도서관 풍경이 왠지 마음까지 느슨하게 했다. 스트레칭을 몇 차례하고 도서관 복도로 나섰다.


3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이용객들을 위한 공간인 강의실 이름들이 유쾌했다. 알롱달롱 강의실, 사각사각 강의실, 담방담방 강의실이라니.


다양한 빛깔의 작고 또렷한 점이나 줄 따위가 촘촘하게 무늬를 이룬 모양을 뜻하는 알롱달롱 강의실에서는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이용객들이 어우러져 오색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활기를 띨 것 같았다.


작고 가벼운 물건이 잇따라 물에 떨어져 잠기는 소리를 뜻하는 담방담방 강의실에서는 왠지 음악감상이나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좋을 공간이었다.


곡식을 벨 때, 펑펑 내린 흰 눈을 밟을 때, 사과를 씹을 때, 혹은 연필로 글을 쓸 때 나는 소리를 닮은 사각사각 강의실에서는 마음의 소리를 읽는 프로그램이나 필사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제격일 듯싶었다.


잠깐이지만 사각사각 강의실에서 마르셀 푸르스트의 문장을 필사하는 필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진정한 발견이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저마다의 강의실에서 이용객들은 새로운 눈을 뜨게 되리라. 자신의 내면이 이전보다 조금씩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 강의를 듣는 순간, 끝까지 듣고 나서, 혹은 함께 나눔의 시간을 가지면서, 개별적으로 사유하면서 무언가를 느끼고 발견해 나가리라 믿는다.


해 질 녘 방문해서 어둠이 깊어질 때까지 함초롬한 시간을 보내고 폐관 직전에 도서관을 나섰다.

수문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해변 주변에는 여러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차박을 즐기는 차량도 몇 대 보였다. 잠시 깜깜한 어둠이 깔린 남해를 파도소리만으로 감지했다. 어둠 저편에 바다가 서성대고 있었다. 다가왔다 멀어져 가기를 반복하는 파도소리에 귀 기울였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가에 졸음이 밀려왔다. 침낭과 모포를 목까지 끌어 덮고 눈을 감았다. 숙면에 빠져들었다.


일출 직전 눈을 떴고, 구름에 덮여 흐렸지만 그래도 아침해는 어김없이 솟아올랐다. 모닝커피를 내리고 사과와 고구마를 챙겨 먹었다. 이제 한승원 시비를 따라 문학산책 여행을 시작했다.


시비를 따라 걷노라니 '낙지 같은 여자'의 한 대목을 옮겨놓은 시비가 있었다.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40여 년 전 MBC 베스트셀러 극장 팀들은 이 근방 어디쯤에서 촬영했을까. 눈앞에 드러난 바다 갯벌에 드라마 촬영팀의 부산한 풍경이 플래시백으로 펼쳐졌다.


드라마 한 컷을 떠올리며 바다를 바라보던 순간, 바다는 무채색이었다. 분명 1984년은 컬러텔레비전이었을 텐데도 내 눈에 비친 풍경은 흑백이었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는 컬러풀한 시간으로 채워지길 바라며 한승원 작가의 해산토굴, 달 긷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승원 부부 가묘에 작가의 아내이자 한강의 어머니가 쓴 시비가 뽀땃한 햇살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달과 별과 해만 좇는 당신의 등만 쳐다보고

당신 그림자만 밟으며,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게 살았지만

나 그래도 행복했네. - 2014년 나리꽃 피는 철에, 임감오(한승원 부인)


이번 장흥여행에서는 한승원 문학기행에 초점을 두었다면 두 번째 여행에서는 이청준 문학기행을 촘촘하게 조망하고 싶다. 그의 생가를 중심으로 그의 대표작과 배경지를 두루 섭렵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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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승원의 해산토굴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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