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군립도서관

신흥사에서 조망한 다도해

by 물들래

완도 신지명사십리해수욕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일출을 맞이했다. 찬바람에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덥힌 뒤, 맨발로 11월 백사장을 걸었다. 따뜻한 햇볕에 온몸을 맡겼다. 푸른 바다에서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가 내 폐부와 발등을 적셨고, 머리카락은 스카프 밖으로 거침없이 나폴거렸다.


내비게이션에 완도 신흥사를 찍고 출발했다. 신흥사, 왠지 친숙한 사찰이다. 몇 년 전 초가을, 설악산 신흥사 템플스테이 신청을 마친 다음날 완도 신흥사에서 전화가 왔다. 템플스테이 신청 관련 안내차였다. 아뿔싸, 사찰이름이 같아서 착각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취소하고 속초 신흥사로 재신청했다. 그때부터였을 거야. 언젠가 완도로 여행을 떠난다면 신흥사에 꼭 들러봐야지 다짐했던 게.


남망산 중턱에 자리한 신흥사에 당도하면 완도읍과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1932년 '불로사'로 창건했으나 '신흥사'로 사찰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낮과 밤의 전망뿐 아니라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도 작렬하며 사라지는 노을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그뿐인가? 완도는 265개의 섬(다도해)과 리아스식 해안이 어우러진 천혜의 지역이다. 갯벌과 해조류 숲, 맥반석 바닷속에는 산소 음이온이 가득해서 전복·다시마·미역 등 풍부한 해산물이 넘치는 바다 마을로 알려졌다.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쉬게 하고 서망산 쪽을 바라보면서 대웅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범종각 앞을 지나다가 정해진 시간에 울릴 종소리를 상상해 봤다. 몸과 마음까지 서늘하게 울려주던 사찰 종소리! 여러 차례 템플스테이를 체험하던 중, 타종에 직접 참여했던 적 있었다. 어느 사찰이었더라? 속리산 법주사였나? 강화도 전등사였던가? 순천 송광사였을까? 다도해를 배경으로 울려 퍼질 신흥사 타종의 울림통은 어떻게 주변에 전달될까 궁금해졌다.


사찰 대웅전 앞 뜨락을 서성거리고 있노라니 갈색털의 ‘중도’와 흰색털의 ‘해탈’이라는 강아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신흥사의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고 있는 듯했다. 사찰 주변을 유유자적 뛰노는 강아지에게 이보다 멋진 이름이 또 있을까. 순하디 순한 중도와 해탈에게 환영받는 느낌을 받았다. 저희 사진 찍어주는 줄 알고 포즈 취하는 모습이라니. 사찰을 찾는 사람 앞에서 자주 취해본 자세여서일까, 무척 자연스러웠다.


내가 템플스테이를 선호하는 것은 선택적 가난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사라지고 진짜 중요한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시선과 마음을 가져보는 것. 잠시 신흥사에서의 시간이 인연이 되어 공(空)의 상태에 머물러 보는 것, 그저 받아들이고 느껴보는 것, 바라보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편안한 흔들의자에 앉아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며 공과 멍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완도(莞島)에서 완(莞)은 원래 '빙그레 웃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완도에 머물던 시간이 참으로 평화롭고 만족스러웠다. 서망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얼핏 일몰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완도에 온 진짜 목적은 깊은 밤 제주행 배편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승선 전까지 시간 보낼 곳이 필요했다. 우선 카페인이 절실했다. 텀블러에 테이크 아웃 커피를 가득 채워서 망설임 없이 완도군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완도군립도서관은 평지가 아닌, 경사가 상당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 멀리 다도해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에서 바다내음을 향유할 수 있었다.


도서관 주차장 앞에 완도 객사가 있었다. 고려 초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조선시대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예를 올렸다. 또한 '청해관'으로도 불렸던 이곳은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도서관 외관은 건축 당시 유행하던 기와집 모양으로 총 3층 건물로 지어졌다. 역사가 느껴졌던 객사는 도서관 건축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도서관 외관이란 것이 대부분 엇비슷했으나 완도군립도서관은 입구와 지붕이 남달라서 입장할 때 타도서관과 차별화된 인상을 받았다.


책 읽는 문화 확산을 위해 2012년부터 매년 전라남도 올해의 책을 선정하여 도민과 함께하는 독서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층 종합자료실에서 「2025년 전라남도 올해의 책」에 선정된 책 중 몇 권을 검색했다. 제목에 끌려서 검색해 본 [고통 구경하는 사회]가 다행히 비치되어 있었다.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웨일북, 34쪽


냄비근성 때문일까, 쉽게 분노하고 금세 잊어버리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 같았다. 행동하는 양심이 발현될 때 공감이 가능하고, 비슷한 아픔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자주 생각하던 메시지를 전달받으니 나의 모습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했다. 조심스레 책의 힘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쾌적하고 심플한 열람실에 자리 잡고 앉아 주변을 조용한 시선으로 살폈다. 젊은 친구들이 많았고, 각자의 1인 공간을 책과 노트북으로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용객들은 텀블벅 사용을 생활화한 듯 보였다. 안온한 실내온도, 적당한 조명등과 어울리게 파스텔톤 꽃이 담긴 흰색 화병 몇 개가 보기 좋았다.


도서관은 완도 주민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쾌적한 환경 조성에 힘쓴 듯보였고, 여러 문화강좌를 운영하면서 정보교육·문화 센터로서의 역할에 정진하고 있었다. 또한 소중한 문화공간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다하는 차원으로 매년 1월 초에 독서동아리 참가자를 모집했다.


지속가능한 독서문화를 형성하는데 독서동아리만 한 게 있을까. 홈페이지 게시판에 매년 초 동아리 모집공고를 냈다. 이후 일 년간의 활동상황을 글과 사진으로 남겨놓기도 했다. 일관성 있는 운영으로 성장하는 독서동아리가 되길 진심으로 응원했다. 독서모임의 소중함을 일찍이 알고 실천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지난 10월 하순 주말에는 완도읍 해변공원 일원에서 완도군민과 관광객 대상으로 독서문화축제가 열렸다. 매년 열리는 행사일 듯싶었다. 북큐레이션과 독서 관련 작품 전시는 물론 다양한 독서체험 부스를 운영했으며 공연과 동화작가와의 만남도 진행했다. 문득 템플스테이를 겸해서 독서문화축제가 열리는 10월에 완도를 여행한다면 일거양득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홈페이지 소식을 둘러본 뒤, 배낭에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를 꺼냈다. 북마크를 펼치고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 책이지만 발제를 해야 하기에 열흘 내에 완독 할 예정이다. 오늘은 150쪽까지 읽어야겠다.


애매모호란 상태는 있을 수 없다. 어느 예술가들도 자기 작품이 절반쯤 완성된 것을 용납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때때로 작품이 미완성인 것은 예술가가 요절하기 때문일 뿐이다. 72쪽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이 떠올라서 이어폰으로 그의 음악을 BGM 삼고 독서했다. 특히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훌륭했다.


슈베르트도 요절하지 않았다면 미완성이 아닌 완성 교향곡을 완성하고 멋진 부제까지 붙였을 수도 있으리라.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은 미완성된 곡이라기보다는 2악장만으로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감동을 선사했다.


누군가는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을 들으며 자살하려 했다는데... 다행히 누군가 발견해서 생존할 수 있었다고. 3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자신의 삶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미완성음악이 어쩌면 그의 삶을 완성해 나가게 도와준 것은 아닐는지. 꿈보다 해몽인가? 아무튼 당사자도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미완성교향곡처럼 내 삶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겠지, 완성을 향해 가는 여정 속에 있으리라. 지금 이 순간, 일분, 한 시간,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멈추지 않고 흐르는 나의 삶 속에서 나는 성장하는 동시에 쇠락해가고 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여정을 거부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면서.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는 어땠을까. 완성된 삶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했을까. 엔딩 속 에리카의 삶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있을까. 부디 그러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상인들은 원래 골라내고 정선해 낸 언어를 누구보다도 잘 구사하는 법이다. 121쪽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상인을 만났을 텐데. 그중 적당한 언어를 선택해서 구사한 상인을 얼마나 만났을까. 때론 팔랑귀가 되어 판매원이 정선해 낸 언어에 현혹되어 몇 시간 뒤면 후회할 물건을 구입한 적 있지 않았나? 때론 집에 돌아와 그때 사고 싶었던 물건을 구입하지 않고 냉정하게 돌아섰던 걸 후회한 적 없었던가. 돌아보니 상인의 언어에 넘어간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법정의 무소유란 책을 읽고나서부터였을 거야. 무소유를 삶의 모토로 하는 사람이 많을 때 상인들은 울 일이 많아질 듯싶다. 그래서 상인들은 더욱더 섬세하게 정선해 낸 언어로 소비자를 유혹할 것이다.


(...)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한국 유학생은 결코 음악가의 혼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며 모범생 클레머는 웃는다. 140쪽


옐리네크는 21세기 초 한국 젊은 음악인들의 빛나는 활약을 상상이나 했을까. 저런 글을 태연하게 쓸 수 있었던 걸 보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듯싶다. 2015년 쇼팽콩쿠르에서 조성진이 수상했을 때 작가의 심경이 어땠을지 궁금했다. 그 순간 자신의 문장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편협하게 갇힌 사고에 대해 부끄러워했다면 작가로서 아직은 희망이 있는 것일까.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 BGM에서 쇼팽을 연주하는 조성진으로 바꿔서 감상하다가, 다시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임윤찬으로 변경했다. 사람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클래식 음악은 독서용 배경음악으로 최고였다. 책과 음악을 넘나들며 활자숲에 빠져있노라니 스피커에서 폐관 소식을 전했다.


10시 폐관시간에 맞춰 현관을 나오니 남해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완도여객선터미널 주차장에 도착했다. 자동차를 먼저 승선한 뒤에 대합실로 이동했다. 을씨년스러웠다. 편의점에 들러 유리병에 든 따뜻한 베지밀 한 병을 마셨다. 스산한 11월 추위를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었다.


승선 후 객실에 가지 않고 밤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좌석을 선점했다. 자동차와 함께 승선한 여행객에게 보내준 스타벅스 쿠폰으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부터 즐겼다. 선박에서의 스타벅스라니... 크루즈 여행 중 커피타임이라니. 그저 커피 향만으로 만족한 시간이었다. 몇 시간 후면 제주항에서 아침을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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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사에서 만난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던 온순한 '해탈'과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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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완도군립도서관 외관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 (우) 완도군립도서관 열람실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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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내 스타벅스 & 완도에서 제주 가는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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