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제주도서관

제주프랑스영화제

by 물들래

3년 전 늦가을이었다. 부산에서 BIFF 폐막작을 감상한 뒤에 여수항으로 향했다. 밤배를 타고 시작된 제주여행, 올레 걷기와 미술관 여행이 목적이었던 제주 한달살이 중 우연히 제주프랑스영화제가 이맘때 열린다는 것을 포스터를 보고 알게 됐다. 제주영화제 소식을 접했으니 영화 애호가가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빠르게 참여하는 방법을 검색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주 CGV에서 총 7편의 영화와 3번의 GV 참여, 모두 무료로 즐길 수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이번 영화제가 햇수로 13년째라는 것, 13년째 이어져오는 행사라니 놀랍지 않은가? BIFF처럼 유료여도 참여했을 텐데 무료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됐으니 내가 할 일은 비록 binge watching일지라도 집중해서 관람하는 것뿐이다.


관람 시 몰입도가 높아서 프랑스 영화를 선호해 왔다. 프랑스 영화는 결국 멀리서 보면 인생을 깊이 성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벼운 듯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자꾸 생각나게 하는 장면과 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13회 프랑스영화제에 참여해서 관람한 7편이 그저 '모두 좋았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개막식 후 며칠 지난 상황에서 알게 된 터라 주말만 참여할 수 있었다. 토요일에 선택한 영화는 총 4편, 일요일에 선택한 영화는 총 3편이었다. 관람한 영화 리뷰를 짧게라도 기록해 두었다.


외로운 영혼을 달래주던 노래와 무릎에 힘이 빠질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하는 커플, 삶과 죽음을 밀도감 있는 유머로 열연하던 배우의 눈빛, 심적으로는 남성이 더 지독한 산통을 인내할 수도 있음을 알게 해 준 작품, 죽은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그동안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얘기를 토해내며 오열하던 아들, 손끝으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색깔로 교감하는 남자와 소녀의 아름다운 댄스 신, 핀란드 순록 아일로의 사계절이 펼쳐지던 장면, 총 12개의 이야기로 비참한 말로를 맞는 인간의 삶과 죽음, N차 관람이었음에도 보는 게 고통스럽긴 처음보다 더했던 아니 에르노의 레벤느망, 시청각적으로는 쉽게 감상했으나 마음을 계속 불편하게 건드리던 아듀, 진정한 모성은 대놓고 하는 게 아니라 멀리서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던 영화까지...


7편에 관한 리뷰를 남겨놓았던 게 얼마 후 보상으로 다가왔다. SNS에 올린 리뷰가 프랑스영화제 이벤트에 당첨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주프랑스영화제와의 첫 만남은 좋은 추억만 내게 남겨주었으니 매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매년 시간을 낸다는 것은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았다.


3년 만에 다시 찾았다. 2025년 11월 5일, 제16회 제주프랑스영화제 개막식과 개막작 [디베르티멘토] 관람을 시작으로 닷새간 영화축제의 서막, 그것은 결국 제주도서관에서 오일 간 독서도 함께 시작됐다는 얘기다.


제주학생문화원에서 개최한다고 했을 때 우선 사운드가 걱정되긴 했으나 기우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제주도서관과 상영관이 있는 제주학생문화원을 도보로 가볍게 이동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닷새간 총 11편의 프랑스 영화를 관람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프랑스다운 영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와 [디피컬트]가 좋았다. 아쉽고 안타까운 점 한 가지는 이 멋진 영화축제에 참여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거다. 이 훌륭한 영화제에 관심 있는 제주시민이 이렇게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몰라서 못 오는 거라면 홍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GV와 함께한 네 편의 영화는 관람 후에도 계속 사유하게 하는 묵직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N차 관람인 영화도 있었지만 다시 보니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한번 본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한 것과 같다'는 장정일의 표현처럼 서너 차례 봐야 영화의 진면모를 발견하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폐막식 공연과 폐막작 [애니멀 킹덤]은 공포스럽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시하는 바가 컸다. 무료로 총 11편의 장편영화와 1편의 단편영화 [유종의 미]까지 온전히 즐겼음은 물론 개막식과 폐막식 모두 참여할 수 있었다. 2022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온전히 즐겼던 축제였다. 사전, 사후 준비에 애썼을 여러 스텝에게 늦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뿐인가? 파브리스 부쉐가 이끄는 프랑스 타악기밴드의 공연까지 제대로 즐겼던 제주프랑스영화제, 무성영화시절 필름을 보며 라이브로 밴드의 연주를 들었던 이색적인 경험은 물론 단편영화를 가장 먼저 생산한 나라가 프랑스였다는 점도 새삼스레 재인식했다.


제주도서관의 쾌적한 종합자료실 환경은 실내온도와 조도, 공기까지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어서 흡족했다. 한마디로 북 앤 무비의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어린이도서관, 별이 내리는 숲까지 오가며 보냈던 시간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도서관 종합자료실에서 [피아노 치는 여자]를 200쪽까지 읽었다. 역시 집중이 어려웠다. 졸리기까지 했다. 이 책, 과연 완독 할 수 있을까? 스트레칭을 몇 차례 끝내고 도서관 자판기로 이동, 샷추가해서 진하게 한 잔 내렸다. 도서관 앞뜰 분홍벤치에 앉아서 사라져 가려는 듯 아쉬운 늦가을의 뒷모습을 상상하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맛이 유독 좋게 느껴졌다. 다시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와의 만남을 이어나갔다.


산책이 필요하다 싶으면 제주동여중 캠퍼스와 수운근린공원을 몇 바퀴 돌며 산책했다. 좀 더 멀리 산책을 나서고 싶으면 신상공원까지 걸었다. 문예회관과 삼성혈이 가까이에 있어서 오가며 쾌적한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대로를 벗어난 제주 골목길 순례는 덤이었다.


그러다 만난 골목길 분위기 카페 다파쳄은 선물 같았다. '평화를 주소서'라는 의미의 다파쳄에서 맛있는 과테말라 드립 커피는 진정한 휴식을 제공했다. 특히 음악 선곡에 신경 쓴다는 카페 사장님의 플레이리스트는 완전 취향저격이었다. 음악 때문이었을까? 2시간 동안 [피아노 치는 여자]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다행히 책 중반을 넘기니 가속이 붙어서 무리 없이 완독 할 것 같았다.


영화제에 참여한 닷새 중 3일 차는 다른 날보다 일찍 도서관을 나와서 제주 이마트에 들렀다. 며칠간 식품을 구입해서 용담 포구에 안착했다. 주변에 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늦은 밤이었지만 아직 영업 중인 카페 조명이 시야를 방해했다.


책과 영화에 집중한 하루여서일까? 주변환경이 요란했지만 잠자리에 들자마자 세상모르게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8시간 이상 숙면을 마치고 나니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바로 앞 푸른 바다 위로 주황빛 일출 기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삶은 계란과 둥굴레차, 토마토, 사과, 빵, 야채 수프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신산공원에 들러 아침 산책을 했다. 산책인구가 많았다. 나도 로컬인척하며 걸었다. 반려견 목줄에 '들래'라는 이름이 반가워 아는 체를 했더니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너무 사랑스러운 들래가 물들래의 피붙이처럼 느껴졌던 순간도 제주에서의 추억으로 기록된 순간이다.


제주도서관 5일 차, 계획한 대로 [피아노 치는 여자]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예술과 광기, 그 위태로운 경계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싶은 에리카의 비극적 초상을 맞닥뜨린 시간은 진정 고통스러웠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순간들이 있었다.


옐리네크 특유의 냉소적이고 분석적인 문제를 통해 에리카의 내면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든 원작의 파격적인 내용을 충실하게 영상으로 옮겼다는 평을 받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가 '사건 중심'이라면 소설은 '심리 묘사'에 큰 비중을 다는 점에 대해 큰 이견이 없을 듯싶다.


영화는 엔딩 신에서 그동안 억눌린 감정을 한 번에 쏟아내며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클레머를 뒤로 한 채 걷는 에리카의 모습에서 의연한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집으로 가서는 이전과 다른 에리카로 살리라 믿고 싶었다. 그 고통스러운 인생수업을 통해 분명 얻은 게 있을 테니 말이다.


에리카로 분한 이자벨 위페르의 소름 돋는 연기가 펼쳐졌던 현장, 비엔나 콘서트홀 앞을 서성거렸던 2023년 초겨울이 생각났다. 임팩이 강한 영화 속 명장면 현장을 여행 중 둘러보곤 하는데, 서늘한 바람이 매몰차게 불어대던 콘서트홀 주변에서 에리카를 다시 반추했다.


에리카의 억압된 욕망은 결국 잘못된 모성애 때문이지 않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인간을 끔찍하게 파괴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이 책은 내게 질문한다. 부모의 양육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과 지난날 양육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너는 어떤 부모였고, 앞으로 어떤 엄마로 남고 싶은지에 대해서. 딸의 자유를 존중해야 타인들도 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어머니는 딸의 자유를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는데, 이젠 다른 사람이 딸의 자유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328쪽


에리카가 클레머를 만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변화했길 바랐다. 미미하게나마 성장했길 바랐다. 그녀의 진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에리카의 진심이 오롯이 느껴지던 부분에서는 그나마 희망이 느껴졌으니까.


그녀는 클레머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행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 "사랑은 사죄하고 용서하는 거야.” 그것이 에리카의 생각이다. 273쪽


문득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언급한 '합일적 사랑'에 관해 떠올렸다. 프롬은 미숙한 사랑과 대비하여 대상과 온전한 합일에 이르는 사랑의 기술을 얘기하면서, 필수적인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기술에 가깝다."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 우리네 삶이란 것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어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롬이 언급한 '사랑의 기술'인 것을. 거기에서 삶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음을... 그 연장선으로 지금 나는 길 위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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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제주프랑스영화제가 열린 제주학생문화원 & 도서관에서 가까운 카페 다파쳄 드립커피를 마신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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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서관 앞뜰 & 1층 로비 자료실 입구 & 함덕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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