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일출도서관

성산포 시인의 시집을 펼치다

by 물들래

광치기 해변에서 일출을 마주했다. 멀리 성산 일출봉 주변으로 어슴푸레한 여명이 새어 나왔다. 잔뜩 덮인 먹구름사이 고요하던 새벽 공기를 가르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젯밤 체크인한 차박지가 일출 포인트 지점이라 아침잠을 설친 채 사진 찍으려고 몰려든 인파로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여기저기서 셔터 눌러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그들이 원한만큼의 찬란한 해돋이는 아니었다. 시끄러운 공간을 벗어나 이생진 시인의 시비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일출을 찾는 이들은 많았지만 시비를 찾는 이들은 없었다. 광치기 해변에서 성산 일출봉의 우측 풍광을 만났다면 이곳에서는 좌측 풍경과 우도 풍광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날이 한참 흐렸지만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상쾌한 공기와 적당한 습도였다.


준비해 온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이생진의 시비에 새겨진 시 하나하나를 마음속으로, 때로는 소리 내어 낭송했다. 제주 출신이 아닌 시인이 제주 명예시민으로 임명됐다는 건, 제주 속살을 긴 시간 관찰하면서 길어낸 아프고 맑고 가슴 시린 시어들이 큰 몫을 했으리라.


이생진 시인이 걸었을 거리를 홀로 걷는 동안 수평선에 눈을 베이진 않았다. 날씨가 흐려서 수평선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강렬하게 태양이 내리쬘 때가 돼서야 수평선은 눈동자를 베일만큼 번득거렸다. 제주 해안을 걸으며 여러 번 수평선에 눈이 베일 것이다. 베여도 좋다. 잠시 눈 감고 바다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그저 계속 성산포 시어를 마음속으로 되뇔 테니까.


베인 눈이 치유되면 나는 외로운 파도 소리를 들을 것이다. 성산포는 파도로 말했다. 외롭다, 외롭다, 외로우니 나를 좀 품어 안아 달라고 했다. 그랬구나. 늘 바다에게 안아달라고만 요구했는데. 외로운 바다를 한 번도 품어 안아준 적이 없구나. 아아~ 바다야, 파도야, 미안해. 외롭다고 그렇게 수백수천 번 파도로 외쳐댄 너의 고독을 외면한 나를 용서해 다오. 우린 어쩌면 오래전부터 동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외로운 것들은 금세 외로운 걸 알아본다고 생각했는데 바다, 너의 외로움을 이제야 알아챈 나를 부디 용서하렴. 이제 외롭다고 외치는 너의 격랑과 시련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거야. 그러다 거센 파도소리에 귀가 베일지도 모르겠지만.


시인이 걸었을 시인의 거리를 걷는 이들은 모두 시인이 되는 걸까? 쉼 없이 움직이는 바다, 구름, 파도, 바람과 공기가 어느 순간, 멈춤 동작으로 인지됐다. 그 순간이 시의 순간으로, 마음속에 순간의 영상으로 남는 게 아닐까. 누가 그랬나? 사진은 시를 닮고, 영화는 소설을 닮았다고. 공감 가는 표현이다. 시의 순간, 온전히 멈추었는가? 그 순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 나인가? 나는 무엇인가? 내가 살고자 하는 대로 살고 있는 나인가? 오로지 나, 나, 나를 객관화시켜 보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닐까? 성산포는 끝없이 질문했고 난 답을 찾으려 애썼다.


성산일출 도서관 오픈 시간에 맞춰 주변을 산책했다. 1998년 개관한 도서관은 아담한 건물이었다. 환경미화원 아주머니께서 바닥을 너무 깨끗하게 청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공공건물을 자신의 집처럼 깨끗하게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새삼 느꼈다. 자주 이용하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드리고 열람실에서 읽고 싶은 책 몇 권을 검색했다.


비치된 이생진 시인의 시집 두 권과 산문집 한 권을 들고 종합자료실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방감 있는 화이트톤 인테리어가 잡념을 없애주었다. 약간 찬듯한 공기는 오히려 독서를 북돋아 주었다. 시 읽기에 제격이었다.


2018년 출판된 이생진의 시집 <무연고>에서 혼자 여행 중인 내 마음을 잠깐 훔쳐버린 시 '혼자 살기'를 마주했다. 마음에 와닿는 부분을 몇 차례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시를 읽으며 서울과 제주에서 각자 혼자 살기를 하고 있는 우리 부부를 떠올렸다. 서로의 공간에서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우리 부부의 삶의 태도가 좋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안부와 적당한 그리움을 피력하는 시간이 고마웠다. 이 시를 룸메에게 소개해야겠다.


아내 없는 생활이 두 배 세 배 바쁘다

이불을 내걸어야 하고

밥을 해야 하고


빨래에 청소까지

물 묻은 손으로 전화를 받고


그럼 내 시는? 하고 책상 앞으로 간다

읽다 만 책을 다시 펴 든다


"우리는 두려움과 친해져야 하며, 그 한 가지 방법은 글로 쓰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말을 줄리언 반스가 인용했는데.

나도 그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시 쓰기에 매력을 느낀다 이생진의 시 「홀로 살기」에서 일부 발췌


두려움과 친해지는 한 가지 방법은 글 쓰는 것, 저절로 주억거리게 만드는 표현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과 비슷할 24시간,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살았다는 걸 증명하듯. 어제의 24시간과 그제의 24시간이 조금이나마 다르다는 듯. 같은 걸 보고 항상 일관된 생각을 하는 건 아니라는 듯. 어제의 나무와 오늘의 나무가 다르듯. 함덕해변과 성산포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다르듯. 늘 변하는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지금 쓰고 있는 글이라는 듯. 그렇게 글로 남기려 한다.


쇼스타코비치의 말을 줄리언 반스가 인용했고, 그걸 이생진이 재인용했으며, 지금 필자가 또 인용하고 있다. 어쩌면 인생도 인용의 연속이 아닐까. 나로 산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흉내 내고 있을지 모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가능할까? 한글을 배워서 깨우치듯 누군가 만들어놓은 언어를 익혀서 소통하며 때때로 나의 글 속에 끌어다 쓴다. 과연 오롯이 내 것인 게 있을까. '표절'은 훔친 거지만 출처를 밝힌 '인용'은 끌어온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점검하는 힘이 있는 '인용'이 그래서 나는 좋다.


2018년 발간된 이생진의 산문집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에서 길게 사유했던 부분을 옮겨본다.


... 행복을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록이다. 그림, 글, 사진은 그때를 있게 하는 기록이다. 기록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면서 얻은 일들이 기억력이 사라질 때 사라지고 만다. 사람은 배워가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경험과 흔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또 다른 사람이 그 기록을 이용하게 된다. 「바다에서 건져낸 시」에서 일부 발췌


그의 글이 아니어도 필자는 기록으로 남기는 습을 버리지 않고 실천하고 있다. 많은 사진을 찍는 건 아니지만 사진을 보면 그때 그 순간으로 자연스레 이동한다. 그곳에서 느꼈던 추억들이 오감으로 감지된다. 사진 한 장 앞에서 현장의 바람과 공기는 물론, 거기서 맡았던 냄새와 주변 소음까지 되살아난다. 다이어리 기록까지 꺼내보면 그때 내가 느꼈던 감상을 좀 더 선명하게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기록하고 다른 사람의 기록을 이용하곤 한다. 시인의 산문집 제목처럼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지금 나는 그 섬에 혼자 와있다. 그곳에서 많은 걸 얻고 느끼고 사유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성산포에 왔으니 이생진의 대표 시를 다시 읽고 싶었다. 좋아해서 자주 애송하는 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가 담긴 페이지를 폈다. 소장하고 있는 시집이라 가끔 꺼내곤 했지만 성산일출도서관에서 읽는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서울에서 읽는 정서와는 사뭇 달랐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일부 발췌


시를 읽고 나니 왠지 소주 한 잔에 해삼 한토막 먹고 싶어졌다. 수평선을 마주하고 파도소리 들으며 마시는 소주라니. 소주 첫 잔에서 왠지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독한 소주 한 잔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 잠시 뒤 온몸이 뜨겁게 化해 질까? 내 마음속 슬픔을 듣고 바다가 대신 삼켜줄까? 빈자리에 대한 그리움도 파도가 갈음해 줄까? 그때 두 뺨에 닿는 바닷바람은 얼마나 차가울까? 파도가 두 뺨을 후려쳐줄까?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게 될까?


성산일출도서관을 나서니 해거름 녘이었다. 먼산에 파스텔톤 색조가 귀가를 종용했다. 돌아갈 집은 너무 멀고 마음은 소주 한잔을 부르고 있으니. 지금 당장 갈 곳은 파도소리 벗 삼아 해삼한토막에 소주 한잔 곁들일 바닷가 술집밖에 더 있으랴. 제주에서 일년살이 하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알려준 횟집 상호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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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성산일출도서관 & 도서관 내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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