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고을도서관
아주 오랜 옛적, 약 1,500여 년 전 강처사의 효성과 금산 인삼에 관한 민담, 직접 그곳에 가서야 알게 됐다. 강처사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노모의 병을 낫게 해 달라며 정성을 다해 기도하던 중,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관음봉의 풀뿌리를 달여드리라는 명을 실천하자 어머니가 완치되었다는데...
그때부터였을까. 선물 같은 인삼을 삼계탕에 넣었던 것이. 매년 복날이면 인삼 한 뿌리가 담긴 삼계탕을 먹곤 했다. 인삼은 각종 질병 예방과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 신비의 영약이라고 전해지지만 모든 이들에게 그런 건 아닌듯싶다. 고혈압·당뇨·심장질환·임산부 등 특정인들에게는 주의가 필요한 음식으로 알고 있으니까.
도서관 이름이 '금산인삼고을도서관'이라고 하니 인삼 생각과 동시에 뇌리 속엔 인삼의 오묘한 자태가 자연스레 그려졌다.
금산 기적의 도서관이라 해서 강원도 '인제 기적의 도서관'처럼 대형 도서관을 연상했는데 아니었다. 금산 기적의 도서관은 자그마한 어린이 도서관이었다. 방문했던 그 시간, 어린이와 학부모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던 걸까.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프로그램을 끝마치고 나서는 모습이었다. 엄마와 함께 떠난 아이들도 있지만 그대로 남아서 편안한 자세로 책삼매경에 빠진 아이들도 있었다. 공간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안온한 실내가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 푸근하게 감싸주었다.
다양하게 마련된 좌석 이곳저곳에 자유롭게 앉아 책 읽고 있는 아이들 풍경은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그림동화책 몇 권을 읽었다. 색감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림책에 시선을 던지는 순간은 뭐랄까, 마음에 달콤한 휴식을 선물해 주는 듯싶다.
내 서재에도 여러 권 꽂혀있는 익숙하고 반가운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펼쳤다. 같은 작품인데 다른 공간에서 읽으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집에 가서 동일한 작품을 다시 꺼내 읽으면 이곳에서의 풍경이 겹쳐질듯싶다. 누가 그랬더라?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라고 말한 이가. 그런데 어쩌랴. 좋았던 경험으로만 추억이 된 곳, 금산 기적의 어린이 도서관이었다.
지척에 위치한 금산인삼고을도서관로 이동했다. 1층 쉼터에서 텀블러에 담긴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나 자신과 마음으로 소통해 나갔다. 이틀 전에 시작한 이번 여행에 대해서. 무엇이든 결심하면 실행에 옮기는 나의 실천력에 대해 양손을 엇갈려 어깨를 다독이며 칭찬해 주었다.
2, 3층 자료실로 오르자 혼자 조용히 영화 관람과 독서할 수 있는 공간이 펼쳐졌다. 한쪽에는 사려 깊게도 몸이 불편한 이용객들을 위한 독서 보조기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천천히 자료실을 둘러보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공간을 찾았다. 서너 시간 나를 부릴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가방에서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를 꺼냈다. 이번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여서 집에서부터 챙겨 온 책이다.
예술과 광기, 그 위태로운 경계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에리카의 비극적 초상을 만나야 하는 책이다. 억압된 욕망과 비뚤어진 모성애가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파헤친 보고서로 母의 지독한 집착과 간섭으로 모든 욕망을 거세당한 에리카가 클레머를 만나면서 변화하는 성장소설이랄까.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천재성과 작가적 실험정신으로 격찬을 받는 동시에 도전적인 문제 제기와 노골적인 성애 묘사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다. 그녀의 작품은 독일 대학의 문학 강의에서 매우 빈번하게 다뤄지고 있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2004년 옐리네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으로, 자전적 성격이 짙은 소설이다.
이 책과의 인연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로 먼저 만났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십여 년 전 손에 잡았았으나 내용이 워낙 놀랍고, 읽으면 읽을수록 수위가 높아져서 완독 하지 못한 채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처럼 이상하고 독특한 독서는 처음이었다. 생소하고 난해하고 불편감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 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70쪽 분량을 읽고 덮어버렸다.
에리카가 소유한 삶의 공간은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자신만의 방이다. 아무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 방만은 완전히 그녀의 것이니까. 어머니의 영역은 이 집의 나머지 전부다. 8쪽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중첩되는 지점이다. 에리카는 진정 자기만의 방을 소유했던 걸까.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닌 정신적, 심리적으로도 자유로운 자신만의 방을 소유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여성들이여, 그대들은 자신만의 방을 갖고 있는가. 지금 나의 여행은 어쩌면 자기만의 방을 확장한 것일 수 있다. 과연 그럴까. 필히 자문자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옥외 정원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문이 닫혀있던 관계로 4층을 둘러보았다.
4층 전자정보자료실에서는 컴퓨터 및 노트북으로 정보검색, 동영상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문화강좌실에서는 삶의 지혜와 품격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상시 열리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자원활동가 양성교육으로 파손도서 보수법 강연이 있었다고 해서 관심이 갔다. 파손된 책이 있다는 것은 부주의해서 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이용객들이 책을 많이 읽었다는 반증 아닐까. 그렇게 찢어지고, 떨어진 책들을 수선해서 다시 튼튼한 책으로 재탄생시킨 과정을 상상하노라니 소박한 감동이 전해졌다.
도서관 바로 옆 건물에는 실내수영장이 위치해 있다. 아침 일찍 수영장에서 주부들이 수영강습받는 모습을 보면서 뻔한 얘기지만 독서보다 먼저 신체가 건강해야 지속적인 책 읽기가 가능하다고 느꼈다. 뻔한 게 때론 가장 중요한 일인 경우가 많다. 당장 수영은 못하더라도 걷기 운동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월영산 출렁다리로 향했다.
월영산과 부엉산을 잇는 길이 275m의 무주탑 출렁다리로 금강 상류의 아름다운 수변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금산, 월영산 출렁다리는 산책코스로 손색이 없었다. 출렁다리 입구까지 이어지는 계단구간에서 숨이 살짝 차올랐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으며 걷는 동안, 내면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사위가 고요했다.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조명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빛을 비추는 여행을 실행 중이다. 내 안에 무수히 많은 나를 이번 여행에서 예외 없이 발견해내고 싶다. 과거로부터 배우면서 촘촘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오늘이란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다. 그 사이에서 어떤 모습의 나를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