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초롱이지만 상당히 초롱 하지 않은... 용서까지 꿔달라고 하는... 비굴한 오만함을 가진 이중 작가 초롱, 이 책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단편 하나를 읽는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지인 몇몇에게 추천했는데 철회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책 제목에, 이미상이란 작가에 대해 궁금증이 인다면 읽어봐도 무방하다. 상당히 매력적인 작가임에 분명하니까.
요즈음 한국 여성 작가들 대세인 모양이다. 너무 많다. 글 잘 쓰는 작가들이...
내 마음에 오래 걸어두고 싶은 문장은... "한 번만 용서를 꿔줬으면 했다."
누군가에게 가능한 한 거의 빌리지(책 대여 제외) 않고 지금껏 살아온 내게 다소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용서까지 빌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의외의 재미를 선사했고,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계속 입안에 맴도는 오늘의 문장이 될듯싶다. 한 번만 용서를 꿔졌으면 했다... .
아내는 조용한 ADHD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여자애들은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질 않아서 병인 줄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대. 깜찍한 얼굴로 수업 시간에 딴생각만 하는 거지." 11쪽
곁에 옅게, 있어주어 고맙습니다.
젊은 시절, 아내의 묘한 습관 하나가 떠오른다. 아내는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었다. 때론 쉼표, 때론 줄임표. 하긴, 하지. 하긴, 하는 남자지. 형은 적어도 남의 말을 듣다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하며 나갔다 올 줄은 알지. 천천히 홀로 걸으며 하긴…… 할 줄 아는 인간. 딱 그만큼 달라질 수 있는 거야. 하긴, 하는 만큼. 40~41쪽
「어제 네가 한 말이 날리는 뒤통수」는 이렇게 끝난다.
오! 그대여, 말을 아낄지어다.
말을 뱉는 순간, 일관성의 곧은 관성이 독이 되어 뒤통수를 칠 터이니. 82쪽
…… 사과할 것이 넘치는데 사과할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초롱은 뻔뻔하게도 영군이 자신을 한번 봐줬으면 했다. 영군이 한 번만 용서를 꿔줬으면 했다. 그러면 언젠가 초롱도 푸지게 자서 피부가 맑고 마음이 순한 날,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마냥 용서하겠다고 다짐했다. 85쪽
그러나 목경은 또한 알고 있었다. 어떤 기억은 통으로 온다. 가슴을 빠개며 기억의 방이 통째로 들어온다. 장의사가 고모의 발에 씌운, 삼베 버선 끝에 맺힌 기억도 그랬다. 311쪽
로렘 입숨의 책 구병모
의미 없는 문장이나 단어들의 집합
로렘 입숨(라틴어의 일부분을 임의로 선택하여 만들어진 텍스트로, 의미 없는 문장이나 단어들의 집합으로, 현실적인 내용이나 의미는 전혀 없다)
소설가란 얼마나 흥미진진한 직업일까?
영화감독 미카엘 하네케가 자신은 평생 심리 상담이 필요 없다고 그랬지. 소설가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듯하다. 세상에 일어 남직한 모든 일들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축복인가?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영화는 스크린으로 담아내지만 작가는 종이에 글로 담아낸다. 어떤 게 더 끔찍한 작업일까? 선택이 쉽지 않지만 두 가지 직업 모두 대단한 것만은 분명하다.
구병모의 머릿속 지도를 훔쳐보고 싶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헤쳐놓을지. 그 헤쳐놓은 이야기보따리를 따라가다 보면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세계가, 그러나 여전히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끔찍하고 처절한 일들이, 흥미진진한 일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세계를 책 속에서 만나게 되면 책장을 잠시 덮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그 세계 속에서 머물고 싶은지 도망치고 싶은지, 그곳으로 누굴 초대하고 싶은지, 방문한 누굴 거부하고 싶은지...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겠지. 그러다 보면 내 머릿속 세계도 구병모의 글 세계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순간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기억하고 싶은 두 편의 단편에서 일부를 옮겨본다.
"마음에 걸리는 문장과 마음에 걸어놓는 문장의 차이는 따로 마음에 있다."
"…… 공감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며 미래나 내일만큼이나 영원히 다다를 수 없음을 전제로 한 개념이자, 인류가 발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위선 내지 도취에 의한 착각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70쪽
"……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있는 힘을 다해 무의미해지는 것이었다. …… 정적보다 완벽한 음악이 없듯이, 점 하나 찍지 않은 흰 도화지가 화려한 그림을 압도하듯이, 태어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삶이듯이." 74쪽 『로렘 입숨의 책』, <동사를 가질 권리>, 2022
…… 아무것도 아닌 일로 목숨을 잃는 젊은 혈기에 혀를 내두르겠지. 그러나 나의 고작은 남의 고작과 같을까? 너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실은 그에게는 전부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없다고 할 만한 것이, 너에게도 언젠가는 생길지 모른다.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진지하게 목숨을 걸어도 좋은 것이 말이다. 116쪽
사랑하는 딸, 네가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누구와 싸우더라도, 아빠의 마음이 항상 너와 함께 한다는 걸 잊지 말아주렴. 죽음을 자초하지 말고, 자신이 지나치게 비겁해지지 않는 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모욕을 주는 자들을 섣불리 용서하지 않기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진심 없는 화해에 서둘러 응하지도 않기를 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세상은 너를 무너뜨리거나 해코지하기에 여념이 없을 테지만, 무엇보다 용기를 잃지 말기를. 123~124쪽 『로렘 입숨의 책』, <입회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