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조명, 막간의 쉼표. 이것은 새로운 악장을 위한 숨 고르기였다"
이전 악장의 격정적인 연주가 멎고, 무대 위 조명이 꺼졌습니다. 길고 긴 쉼표, 인터미션이 찾아왔습니다.
피아노 건반 대신 제가 다시 마주한 것은 익숙하면서도 한없이 낯선 학습지 교사라는 자리였습니다.
솔직히 마음 깊이 원치 않았던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방학,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 선 아들의 학원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현실의 무게는 다른 선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영어를 제대로,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며 눈물까지 글썽이며 제게 매달렸습니다. 논술 학원도 더 다니고 싶다는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학원비는 산처럼 느껴졌지만, 그 시기가 아이의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은 짧았습니다.
'그래, 딱 3년만… 3년만 버티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제 삶의 악보 위에 원치 않는 페르마타(늘임표)를 길게 그었습니다.
매일같이 마음 동하지 않는 일을 반복하는 시간은, 마치 끝없이 늘어지는 음표처럼 더디고 고통스럽게 흘러갔습니다. 남몰래 베갯잇을 적시던 밤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힘겨운 시간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있었습니다. 아들은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노력했고, 학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성적이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덕분에 학원비 감면이라는 고마운 혜택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그 3년 동안, 저는 단순히 견디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잿더미 속에서도 불사조가 날갯짓을 준비하듯, 언젠가 다시 한번 힘차게 날아오르기 위한 준비를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이어갔습니다.
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과에 편입해 새로운 배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학습지 수업은 오후 1시부터 시작되었기에, 동이 트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오전에는 온라인 강의에 몰두했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아온 깊은 밤에는 밀린 과제와 씨름했습니다. 지친 몸을 겨우 뉘이는 그 순간까지도, 언젠가 나만의 새로운 음악을 연주할 그날을 그리며 연습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 노력은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라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낮에는 학습지 교사로 생계를 책임지고, 주말에는 외국인복지센터에서 수업 보조 교사로 봉사하며 소중한 현장 경험을 한 땀 한 땀 쌓아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수능 시험을 마친 그해 11월, 저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학습지 교사라는 무거운 이름을 내려놓았습니다. 곧이어 외국인복지센터의 정식 강사로, 그리고 경기도에 위치한 대학교 한국어센터에서도 강의를 시작하며, 저는 꿈에 그리던 새로운 무대로 한 걸음 더 깊숙이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1년간의 귀한 국내 경험을 발판 삼아, 제 가슴속 깊은 곳에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해외에서 살아보는 꿈'이 현실로 다가올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세종학당 해외파견 교원에 당당히 선발된 것입니다!
제가 향하게 될 곳은 태국 방콕, 이름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낯설지만 매혹적인 도시였습니다. 후끈한 동남아의 공기 속에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그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함께 파견된 동료 교원 중에는 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뚝심 있게, 배운 대로 오직 한국어로만 수업을 이끌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수줍게 다가와 제게 건넨 말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한국어로만 말씀해 주셔서 제 듣기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이제 한국 가수들이 무대에서 하는 말을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말은 단순한 칭찬을 넘어, 제 마음에 잔잔한 울림과 함께 강력한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한국어로만 수업하는 것이 옳다는 제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짜릿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원래 태국어 보조 교재로 진행되는 다른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 수업으로 옮겨왔는데, 그는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이드 일을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진짜 한국어로 배우고 싶어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태국을 더 잘 소개하고 싶거든요."
그의 말에는 한국어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중급반 수업에서는, 한국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태국으로 돌아와 한국어 교사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는 학생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들의 반짝이는 꿈 이야기를 들으며, 제 안에 또 다른 열망이 피어올랐습니다.
'나 또한 한국 문화와 문학을 더 깊이 탐구하고, 이들에게 더 풍성한 지식을 전해주고 싶다.'
귀국 후, 저는 망설임 없이 대학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동시에 서울의 한 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강의를 시작하며, 한국어 교육이라는 제 인생의 새로운 악장을 힘차게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예기치 않은 인터미션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전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 팬데믹이었습니다.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고, 세상은 고요해졌습니다. 저는 이 길고 조용한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대학원 수업과 논문 준비에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외부 활동은 멈췄지만, 내면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석사 학위를 손에 쥐었고, 지금은 집에서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규모가 크고 교육과정이 체계적인 또 다른 서울의 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태국에서 만났던 학생들과 SNS를 통해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을 여행 온 학생들과 만나 함께 웃고, 방콕에서의 뜨거웠던 시간들을 추억합니다. 태국에서 처음 집을 구할 때 발 벗고 나서서 밤늦게까지 함께 고생해 주던 학생, 여동생이 태국을 방문했을 때 현지인만 아는 맛집과 편리한 교통편을 꼼꼼히 알아봐 주던 학생, 마지막 학기에는 다 함께 미니버스를 빌려 떠났던 작은 시골 마을로의 잊지 못할 여행… 그리고 저의 마지막 날, 공항까지 마중 나와 눈물로 저를 배웅해 주던 학생들의 그렁그렁한 눈망울.
"컵쿤카…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꼭 다시 보고 싶어요." 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한때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아 절망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학습지 교사로 일하면서도 한국어 교사의 꿈을 놓지 않았고, 낯선 땅 태국에서는 학생들의 빛나는 꿈을 응원하며 저 자신의 길을 더욱 선명하게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다시 한국이라는 무대 위에서 새로운 길을 굳건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제게 '한국어'는 단순히 소통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힘이며, 세상과 저를 연결하는 가장 아름다운 선율입니다. 그 영롱한 선율을 따라, 저는 지금도 저만의 길을 개척하며, 한국어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만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