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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 굽는 타자기 Jun 18. 2021

드라마작가 꿈을 포기한 이유

꿈을 포기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해

이제 드라마를 쓰지 않겠다고 선포한 이후, 9살 딸이 걱정스럽게 내게 물었다.


"엄마, 이제 작가 안 하는 거야?"


"드라마 작가 되는 꿈을 포기한 거지. 엄마는 원래 방송작가고 하던 일은 계속할 거야."


그래도 딸이 자꾸 드라마 작가가 되는 걸 포기했으면 작가 일 자체를 그만둔 게 아니냐고 하길래 내가 설명했다.


"엄마가 드라마 교육원을 다닌 건 니가 뭘 배우기 위해 학원 다닌 거랑 똑같아."


딸은 그제야 내 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엄마는 그냥 학원을 그만둔 거네."


딸의 말대로 학원 그만둔 건데 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3년 전부터 드라마 작가가 되고자 드라마 작가 교육원을 들락거렸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쉽지는 않았지만 기초반, 연수반, 전문반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스텝 바이 스텝으로 내 꿈과 가까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조금씩 꿈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 한 해 교육원 선생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스터디에서 영상 필사도 하고, 따라 쓰기 대본도 쓰고 나름 최선을 다했다. 매주 숙제를 하다 보니 이렇게 하면 그 언젠가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나는 제대로 드라마를 쓰지 못했다. 작법서와 선생님으로부터 배울수록 내 글과는 멀어지고 시놉시스에 정말 내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공모전 당선을 위한 글을 쓰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드라마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길을 잃었다.


운 좋게도 내 드라마 한 편을 내고 심사에 통과되어 전문반 합격했을 당시에도 갈까 말까 망설이게 되었다. 교육원 선생님과 선배 작가님, 남편 이렇게 세 사람에게 물었다. 전문반에 갈지, 말지를. 내가 결정해야 할 문제였지만 비겁했다. 내 결정에 책임이 지기 싫었기에. 세 사람 모두 전문반에 가보라는 조언을 해줬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니 끝까지 도전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이제껏 취미로 공부해온 게 아니니 실력 향상을 위해서 필요할 것 같다고. 그렇게 누가 전문반에 가라고 등 떠밀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모양새가 이미 내 결정과 생각은 미뤄둔 채, 전문반에 들어갔다.


전문반은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줌 화상 수업으로 시작됐다. 한창 잘 나가는 드라마 감독님이 선생님이라 기대가 되고 다시 잘해보리라 결의에 찼다. 하지만 수업이 거듭될수록 나는 자꾸 고꾸라졌다. 다른 동기생들은 자신만의 드라마를 위해 소재 발굴을 하는데 나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공모전에 당선이 될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중요한 건 재미있지 않았다. 내 드라마에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민했지만 결국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감독님은 전체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취미로 할 생각하지 말라고 강하게 얘기했는데 꼭 나한테 얘기하는 것 같아서 자꾸 찔렸다. 아프게도.


이제 드라마 공부를 접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자, 전문반에 갈지 말지를 고민할 때처럼 그 누구의 조언을 구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선택이었다. 더 이상 3년 동안 공부한 게 아까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내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 건 교육원 환불을 받고 나서 알았다. 괜히 그만뒀나 후회 따위 들지 않는 걸 보고. 솔직한 내 마음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지 말자고 노력했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보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아이 키우고, 일하면서, 드라마 공부까지 하는 방송 구성작가라는 걸 앞세우고 싶었던 거란 걸.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은 내 인생에 별 관심도 없는데 난 여전히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란 걸. 꿈을 접는 순간 깨달았다. 예전 같으면 이런 모질이가 있나 자책을 했겠지만 이제라도 내가 미련을, 허울을 내려놓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제 미련 따위는 개나 줘버리지 싶었다. 후련했다.


무엇보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치열하게 일하면서 10년 넘게 해왔던 일이, 지긋지긋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기에 헛된 꿈을 접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익숙하고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맞는데 나는 자꾸 손에 닿지 않고 잘하지 못하고, 나중에 깨달았지만 즐겁지도 않은 일을 손에 넣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어느 SNS에서 그러더라. 한 분야에서 인정받기 위해선 지겨움을 이겨내는 힘이 필요하다고.


그래도 드라마 공부하는 시간이 헛된 시간은 아니었음을 느낀다. 그냥 방송 구성작가가 아니라 드라마를 쓸 수 있는 방송 구성작가라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련다. 얼마 전 애니메이션 원고를 쓰면서 '아, 그래도 드라마 공부하면서 배운 걸 써먹을 수 있네.' 생각했던 것처럼 설사 드라마 작가는 되지 못했으나 내가 꿈 근처에는 있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종종 딸은 내게 묻는다. 엄마 꿈이 뭐냐고. 딸의 눈에도 엄마가 꿈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게 보이나 보다. 아직은 새로운 꿈 찾기는 멀었고 그동안의 꿈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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