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고스톱 치자”
최근에 남편에게 고스톱을 배운 초5 아이는 틈만 나면 고스톱을 치자고 조른다. 아이는 고스톱을 보드게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남편이 왜, 굳이, 뭐 좋은 것도 아닌데, 아이에게 고스톱을 가르쳐준 건가 싶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아 아이에게 한 번만 치자고 한다. 돌이켜보니 딱 한 번! 아이에게 얼마나 달콤한 한 번이었겠는가.
고스톱을 치기 위해 패를 섞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내게 서러웠던 일을 쏟아낸다. 난 재빨리 수습하기 위해 “엄마가 미안했어” 하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아이는 서러움에 울먹이기까지 한다. 이런 아이가 안쓰러워진다. 협상이 필요한 순간이다.
“원래는 한 판만 치려고 했는데 세 판 치자. 꾸마야, 기분 풀어.”
세 판 치자는 말에 신기할 정도로 아이는 금세 울음 뚝. 고스톱을 시작한다.
“엄마, 난 고도리 할 거야!”
“한 장 먹고 무슨 고도리를 하겠다는 거야?”
내 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아이는 그다음 차례에 연이어 고도리 패 2장을 먹고 고도리를 성공시킨다. 내가 신기해하니까 우쭐해하며 이적과 유재석이 함께 부른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노래를 흥얼거린다.
다음 판! 내가 첫 박을 하고 “5점이야!”를 외치기도 무섭게, 아이가 바로 싼 걸 먹는 게 아닌가. 상대방이 피가 없을 때 싼 걸 먹으면 상대의 피를 받지 못하는 거라고 설명해 주니까 아이는 냈던 패를 다시 가져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아이랑 고스톱을 치더라도 페어플레이를 가르쳐줘야 한다. 대학교 친구들이 초짜인 내게 고스톱을 제대로 알려줬듯이, 나도 제대로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아이 역시 고스톱의 상도덕쯤은 익힐 필요가 있다. 내가 아이에게 ‘낙장불입(판에 한번 내어놓은 패는 물리기 위하여 다시 집어 들이지 못함)’의 뜻을 거창하게 설명해 주고, 우리네 인생처럼 엎어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거라고 얘기한다. 아이는 이런 엄마를 야속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도 아이에게 질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이 고스톱 게임은 진지하니까.
1승을 거둔 아이에게 또 질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아이는 10점으로 나고 아이의 패가 한 장 남은 상태에서 고를 외칠지, 말지 고민하고 상황. 난 마음속으로 아주 간절히 아이가 ‘고’를 외치길 바랐다. 왜냐면 내가 광박, 피박을 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한참 고민하던 아이는 ‘고’를 외친다. 휴~ 덕분에 살았다. 아이가 10점에서 ‘스톱’ 했으면 광박, 피박 4배니까 40점으로 나는 거였는데, 아이가 다행히 ‘원고’를 해서 그냥 11점으로 나고, 난 결국 광박과 피박을 면한 상태라 11점이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꾸마야, 인생도 그런 거야.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때로는 스톱을 외칠 수 있어야 하는 거지.”
“엄마는 고스톱 치면서 왜 자꾸 인생 얘기를 하는 거야?”
“고스톱에 우리 인생이 있는 거란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굳이, 뭐 좋은 것도 아닌 고스톱을 치는 거냐?’고 내키지 않아 억지로 시작했던 내가 아이와 고스톱을 즐겁게 치고, 인생까지 논하게 될 줄이야... 처음엔 한 판을 치고자 했지만, 세 판을 치게 되고, 세 번째 판이 ‘나가리’가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네 판까지 치게 된 것이다. 너무 끼워서 맞춘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측불허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아있다. 그리고 대학생 때 친구들과 치열하고 흥미롭게 쳤던 고스톱을 초등학생 딸과도 신나게 치게 될 거라고 어떻게 예상했겠는가.
딸은 3승 1무로 완벽하게 나를 이겼다. 이길 때마다 휴대전화 노트에 자신이 이긴 점수를 야무지게 누적해서 적는다. 벌써 엄마 103점, 아빠 190점. 한 점마다 한 번 뽀뽀해 주기로 정했으니까 나는 딸에게 103번의 뽀뽀를, 남편은 아이에게 190번 뽀뽀를 해야 하는 점수다. 너무 많다. 아이를 이해시킬 만한 거래를 해야 한다. (참고로 아이는 수면 독립은 했으나 엄마나 아빠와 같이 자는 걸 이벤트처럼 무척이나 좋아한다.)
“꾸마야, 100점당 한 번 같이 자기, 어때?”
“100점 말고 50점은?”
“또 딜을 하려고 그러네. 50점에 한 번 같이 자는 건 너무 자주 될 것 같아.”
다행히 내 말에 설득당한 아이는 아직 퇴근도 하지 않은 아빠랑 고스톱을 더 쳐서 200점을 만들고, 2박을 할 수 있겠다며 들떠 있다. 오늘밤 아이는 당당하게 내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엄마! 100점 쌓여 있으니까, 나랑 같이 자야 해!”라고. 그럼 난 아이의 요구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겠지. 이제, ‘뽀뽀 빚진 자’가 아니라 ‘같이 자기 빚진 자’가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