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3년 전에도 1년 가까이 피아노 레슨을 받다가 그만뒀다. 나는 왜 이렇게 피아노를 배우다가 관뒀는데도 기어코 또다시 배우려는 걸까?
초등학교 고학년 때,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서 겨우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할 일이었지만 집에 피아노가 없다는 게 내내 아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설령 피아노가 있었다고 한들 연습을 많이 했을 것 같진 않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피아노가 없어서 제대로 연습을 못 한다는 ‘결핍’이 나를 쪼그라들게 했다.
사실 가족 다섯 명이 사는 좁은 집에 피아노를 들인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어린 마음에 어려운 집 사정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아빠한테 피아노를 사달라고 떼썼다. 삼 남매 중 막내인 나를 편애했던 아빠는 결국 그 언젠가는 사주겠노라고 약속했었다. 나는 그 언젠가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그 언젠가는 오지 않았다. 살림살이는 더 나아지지 않았으니,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갈 일은 난무했다. 피아노를 '살' 돈도, 피아노를 '둘' 곳도 없었다. 게다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피아노를 그만뒀기에, 더 이상 피아노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피아노에 대한 나의 서운함은 결혼 이후 아이를 낳고도 남아있었다. 10년 전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왔을 무렵, 같은 동에 사는 아이 친구네가 피아노를 처분하려고 내놓는 모습을 목격했다. 피아노가 너무 멀쩡해 보여서 아이 친구의 엄마에게 허락받고, 냉큼 그 피아노를 우리집으로 가지고 왔다. 난생처음으로 우리집에 피아노가 생긴 거였기에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그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는 피아노를 치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나는 일과 육아로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기에 피아노를 칠 여유는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피아노를 배웠지만 피아노가 없었다. 이제는 반대로 피아노는 있지만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피아노는 내가 진정으로 갖기 어려운 존재에 불과했다. 어린 나에게 언젠가는 피아노를 사주겠다는 아빠의 약속도, 피아노가 생겼으니 언젠가는 칠 거라는 내 약속도 오랫동안 지켜지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미니멀 라이프에 흠뻑 심취한 뒤로, 가장 먼저 처분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피아노'였다. 먼지만 쌓이고 잡동사니의 수납장으로 전락한 피아노를 진즉에 버려야 했다. 마음의 짐이 되어 우리집에 무용지물로 있던 피아노가 나가는 날, 아주 후련했다. 망가지고, 쓸모없는 건 당연히 버리는 게 맞다는 걸 실감했다.
그 뒤로도 피아노를 향한 내 질척거리는 미련은 여전했나 보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 아이가 피아노를 사달라는 말도 꺼내기 전에 덜컥 피아노를 샀다. 전시용으로 두지 말자는 생각에, 아이는 방문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피아노를 배울 생각을 차마 못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집 근처 자주 다니는 복지관에서 피아노 레슨을 한다는 소식에 선뜻 수강 신청을 하고, 코드 연주법을 익히게 되었다.
1년 가까이 주 2회 복지관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집에 와서 연습하기를 반복했다. 저렴한 수업료에, 한 선생님이 50분 동안 7~8명을 교습하다 보니, 정작 내 레슨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진도는 나가는데 제대로 피아노를 배운다는 느낌이 없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아이 피아노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나도 아이 수업을 끝내고 피아노 개인 지도를 받기로 했다. 진도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곡 위주로 배우기로 했다. 즐겁게 즐기는 마음으로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중 메인 테마인 <인생의 회전목마>를 치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뿌듯했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피아노보다 젊고 예쁜 선생님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아무리 피아노 연습을 하라고 아이를 채근해도 소용없었다. 아이는 숙제로 내준 연습량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나는 참다못해 쓰리아웃제를 도입해서, 앞으로 세 번 숙제를 하지 않으면 피아노 레슨을 받지 못할 거라고 아이에게 경고했다.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숙제를 계속하지 못했고, 아이는 피아노 배우는 걸 그만뒀다. 비록 아이 숙제였지만 엄마인 내가 제대로 못 살폈다는 자책감에, 선생님 볼 면목이 없어서 나도 함께 관뒀다.
그렇게 2년이 흘렸다. 그 사이에 피아노를 여러 번 처분할까도 고민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실 지금의 피아노는 사연이 깊다. 친정 오빠가 내게 빚진 돈 대신에 선물해 준 명품 가방이 하나 있었는데, 올드하고 딱딱한 서류 가방 같아서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 명품 가방을 중고 거래로 팔고 난 후, 내가 사고 싶은 걸 사자는 마음으로 피아노를 샀다. 나는 여전히 이 피아노를 볼 때마다 애증의 감정을 느낀다.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다고 할까나.
올초 새해가 됐으니 쓰지 않는 건 또 버려야겠단 결심이 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바로 '피아노'였다. 며칠 동안 밤낮으로 고심한 결과, 처분하지 못할 바에야 다시 피아노를 배워야겠단 마음이 굳게 들었다. ‘필요하고, 소중한 것만 남기자’는 내 미니멀 라이프의 소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뭐든 꼭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틀에 항상 갇혔던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찰나이기도 했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곧바로 피아노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담 없이 주 1회 아이 30분, 엄마 30분 해서 1시간 레슨을 받고 싶다고. 감사하게도 선생님은 흔쾌히 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제는 체르니 100번, 50번에 연연하지 않는다. 나도, 아이도 좋아하는 노래를 코드 반주법으로 배우고 있다. 현재 내 자작곡 <환영>을 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두 마디 배울 때도 있고, 네 마디 나갈 때도 있다. 스스로 ‘고작 이것밖에 못 해?’ 찌그러질 때도 있다. 하지만 목요일 오후 5시 40분 피아노 수업이 기다려진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만큼 설레고 즐겁다는 방증이겠지? 피아노와 나의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조금은 풀리고 있단 증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