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수영강을 걷는다.
비가 오면 강은 침묵한다_ 박상민
잠에서 깼다. 빗소리였다.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사방이 어둠에 차 있다 슬그머니 어깨에 기댄 새벽의 회색빛. 기운이 없다. 빗소리는 손끝에도 느껴졌다. 한 방울씩 손가락에 걸치는 빗방울의 미온함. 그것에 몰입하는 나. 목과 어깨까지 뻐근해진다.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도 빗소리는 따라왔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누워 있었다. 빗소리에 재즈를 덧입히고 싶어졌다. 이럴 때는 깊은 보컬과 단순한 피아노 선율이면 된다. 그래서 찾은 것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미스티 (Ella Fitzgerald –Misty). 특별한 리듬이나 화려한 선율은 없다. 그러나 깊어져 가는 가을녘. 땅을 저며오는 빗소리와 함께 새벽이 깊게 베인 향에 이 노래를 듣는다면. 날 숨 소리 조차 조심하게 된다. 온 사방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목소리. 내리는 빗소리를 더 깊고 선명하게 만든다.
Look at me
나를 좀 보세요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새끼 고양이 같잖아요
And I feel like I`m clingin` to a cloud
구름에 매달려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I can` t understand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지만,
I get misty, just holding your hand
당신의 손만 잡아도 안개가 나를 뒤덮는 기분이에요
< Ella Fitzgerald –Misty 중에서>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열망. 그것은 나무 위 새끼 고양이가 되게도 하고, 구름에 매달리게도 하며, 그의 손을 잡기만 해도 온 사방이 안개로 뒤덮는 느낌을 가져다준다는 가사. 그 사랑의 이야기와 음악을 벗 삼아 빗속에서 거닐고 싶었다. 결국, 나는 또 수영강을 향했다.
충분히 비로 젖은 수영강은 조용했다. 거니는 사람도, 흔하게 보이던 새들의 지저귐도 없다. 저 멀리. 우산을 움켜잡고,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빠르게 향하는 사람들만 간혹 보인다. 지금 여기에는 수영강과 나. 그렇게 둘뿐이다. 한참을 강에게 말을 걸었지만, 침묵했다. 하늘에서 흩뿌려지는 미세한 물방울이 가득했다. 비라고 말하기엔 미안하고, 안개라 말하기엔 거칠었다. 그렇게 잔뜩 수분을 머금은 수영강은 고요했고, 대꾸하지 않는 수영강을 향해 보란 듯이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엘라 피츠제럴드의 <미스티>에 집중했다. 짙은 어둠 속에 간헐적으로 비추는 가로등은 어느새 재즈 바의 은은한 조명이 되었다. 말하는 것보다 노래하는 것이 즐겁다던 재즈의 여왕은 나를 위해 마음 다해 노래한다. 한참을 지켜보며,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세네번 정도 그녀의 열창이 그쳤고 박수를 보냈다. 이어폰을 뺐다. 오늘따라 침묵하고 있는 수영강이 도무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비가 내려서일까? 물과 비를 흠뻑 머금은 강은 넉넉하게 흘러갔다. 다행히 넘치거나 위협적이진 않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미세하게 움직이는 물소리가 반가웠다. 그리고 그토록 퉁명스러웠던 수영강을 들여다보니 여유 있게 음악을 누리던 나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쩔쩔매며 무엇인가를 옮기고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흘러 내려왔는지 모르는 부유물. 분명 누군가 버린 것들, 힘없이 찢기고 뜯어진 것들을 수영강은 옮기고 있었다. 그제야 그토록 침묵하고 퉁명스러웠던 수영강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티 내지 않고, 오랜 시간, 혼신으로 그렇게 하고 있던 것이다. 말없이, 티 내지 않고, 묵묵하고, 오랫동안. 성실하게. 이 시대에 인기 없고, 가치가 사라진 단어들. 그러나 수영강은 그 단어들과 어울리게 그렇게 하고 있었다.
찾아올 때마다 먼저 안부를 건 강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한눈팔 시간 없이, 침묵으로 그렇게 계속 하고 있다. 빗방울이 미스트처럼 가득해 온 세상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비가 오면 강은 침묵에 잠기는 이유가 있었다.
내 삶의 부유물도 그렇게 흘려보내길 바라는 마음에서일까? 하루를 겨우 버티며, 조금씩 생겨난 것들. 버리지 못한 감정 쓰레기, 찢겨있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 계속되는 경쟁에 조여오는 조급함, 이런 부유물을 무시하며, 겨우 막고 부들거리며 버티던 나. 이제 수영강처럼 침묵하며 그것을 흘려 보내고 싶다. 어렵지만 성실하게, 버겁지만 침묵으로 그것들이 내 인생에서 떠내려 가길 바란다. 여전히 도도하게 흐르는 수영강에게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그 마음으로 미스티의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여유 있게 수영강과 함께 듣고 싶다.
Can`t you see that you`re leading me on
당신이 내 마음을 부추기는 건 알고 있나요?
And it`s just what I want you to do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Don`t you notice how hopelessly I`m lost
내가 얼마나 헤매고 있는지 안 보이나요?
That`s why I`m following you
그래서 당신을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