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쳤어요.” 거침없이 내리쬐는 햇살 아래 무표정으로 아내는 말했다. 내 계획 대로라면 지금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봐야 할 것이 넘쳐났으며, 먹어야 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마술풍선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아내의 한계점이 찾아온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르세 박물관과 오르세 미슬관 그리고 오랑주리 미술관을 한 번에 보려고 했던 것이 문제의 화근이었다. 유럽여행을 가기 전 각자 맡은 도시와 나라를 미리 공부하고 서로가 가이드가 되어주자고 정했다.
그래서일까? 서정적인 피아노가 흐르던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 무대 이탈리아의 피렌체 두오모 성당,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이 함께 묻힌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무덤, 어느 날 해충이 되어 고립되고, 비참하게 살아간 이야기를 써 내려간 프라하 카프카 박물관. 어느 하나 놓칠 수가 없었다. 가기 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계획했던 장소를 현지에서 경험하는 나날들이 기쁨이 연속이었지만, 삼분의 이 지점이었던 파리에서 여행의 변곡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의 튈를리 공원 벤츠에 털썩 앉아버린 아내가 말했다. “이건 제가 생각했던 여행이 아니에요.” 어느 순간 버킷리스트를 해치우는 식의 여행에서 질린 아내는, 개선문을 향해 나플레옹처럼 전진하던 나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부르짖는 잔다르크가 되어 우리의 여행의 이야기를 전복시켰다. 그때부터 우리 여행의 이야기는 빠르고 성급하게를 뜻하는 Presto(프레스토)에서 느리게를 뜻하는 Andante(안단테)로 혹은 아주 느리고 침착하게를 의미하는 Adagio(아다지오)로 변화되었다.
그렇게 여행 가운데 “천천히”를 지향하자 그때부터 도시의 멋과 맛 그리고 냄새와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버스킹을 하는 거리의 악사들의 표정이 보였고, 모네의 정원에서 빛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에 화려함 속에 숨겨진 쓸쓸함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아내의 그 이야기 후에 루브르와 개선문 사이의 튈르리 정원의 벤츠에 앉아, 독일에서 만난 친구가 친절하게 싸준 까망베르 치즈와 파리의 바게트의 풍미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터득한 여행의 방법은 수영강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속도를 조금 늦춰서, 수영강의 소리와 색, 향과 빛깔을 느끼며 걷다 보니 친절한 수영강은 변화하는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를 초대했다.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지만 부산의 겨울은 습하고, 바람이 세다. 특히 수영강을 걸을 때 양볼에 가격하는 날 선 바람은 오들오들 떨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 추위 속에 옷을 움켜잡고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걷다 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여행이 된다. 날씨가 차츰 풀리고 연둣빛 새싹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봄이 되면 수영강에 생기가 가득해진다. 특히 조그맣게 피어난 들꽃들이 이곳저곳에서 햇살과 어우러져 고운 빛깔을 자랑한다. 여름이면 때때로 거대한 바람과 빗줄기가 강을 할퀴고 간다. 그럴 때면 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그것 역시 묘한 여행의 방법이다.
만일 내게 수영강 여행 방법을 묻는 다면 두 가지 정도를 권해줄 것이다.
첫째는 가을의 수영강을 반드시 경험하시길. 습습한 여름이 지나 건조함이 삶에 드리워지는 가을이 오면, 수영강은 타들어가는 노을을 기다린다. 특히 온천천과 합류되는 원동역 근처에 그 노을을 머금은 억새들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가을의 수영강을 걷고 집에 들어가려 하면 수영강은 가지마라고 을씨년스럽게 나를 잡는다.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천천히 걷기. 수영강에서는 모든 걸 천천히 하는 게 좋다. 목적지가 있거나, 운동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천천히를 잊지 마시길. 천천히 말하고, 천천히 걷기를 추천한다. 믈론 천천히 걷는 것은 개인차가 클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린다면 수영강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천천히가 좋다. 가을이 깊게 물든 강가를 천천히 걷다 보면, 속닥거리는 물소리, 바람에 휘파람 부는 억새 소리, 계속해서 대화를 거는 풀벌레 소리가 난다.
아참! 빼먹었다! 중요한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 방법은 잠시 멈춤. 천천히 수영강을 거닐다 보면 넉넉한 게 나를 받아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때 꼭 잠깐 멈추길 바란다. 잠시 멈춰서 하늘과 어우러져 있는 수영강을 낯설게 바라보면 그 묘한 매력에 빠지게 된다. 특히 그대가 걷는 때가 늦은 밤이라면 더 좋다. 부산은 어딜 가든 산이 많고, 평지가 귀하다. 그런데 수영강의 상류 쪽 석대다리에서 반여 농수산물 시장 쪽으로 걸어오는 가운데 잔디가 무성하고 그곳에 넓게 펼쳐진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는 잠시 꼭 멈추길 바란다. 그리고 말을 걸어오는 수영강의 차분하지만, 따스한 소리에 집중해 보시길. 그때 찾아오는 수영강의 멋과 맛을 발견해 낸다면 당신은 이미 수영강을 벗 삼아 여행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롭게 만나는 여행지 속에서 느림을 통해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맛과 멋에 집중해 보자던 아내의 지혜로운 한마디, 그 여행 방법은 이곳 수영강의 여행에서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