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수영강은 낮보다 밤이 아름답다
흐드러진 풀잎 소리 사이로 햇살을 머금은 수영강이 곱게 일렁인다. 가을빛이 수영강을 감싸 안았다. 바람소리에 따라 맥주 빛 갈대가 살아 움직이며, 찬란한 노을을 반긴다. 노을은 금방 자신을 숨긴다. 곧이어 밤이 찾아온다. 요즘 내가 수영강을 여행하는 시간은 꽤 늦다. 아이가 잠들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리다, 숨죽이며 출발한다.
수영강을 향해 가는 길목에는 장산중학교 교문이 있다. 매일 깔깔대며 등교하는 소리가 이 늦은 시간에도 잔잔하게 들린다. 여행의 기쁨은 익숙하게 느꼈던 것들의 낯섦이다. 교문을 지나며 운동장이 슬쩍 보이는 붉은 벽돌의 담에는 장미덩굴이 가득하다. 지금은 다 시들고 보이지 않지만 5월~6월이 되면 빨간 장미가 가득한 그곳은 장미의 빼어난 미모와 향에 취해 천천히 걷게 만드는 마법이 펼쳐진다.
조금 더 걸어가면 대림아파트 앞 횡단보 도앞에 멈춘다. 아래로는 해운대와 광안리로 위로는 양산과 경주를 향하는 큰 도로. 언제나 차가 많지만 이 시간만큼은 여유가 있다. 그래서일까 꽤 많은 차들은 정규속도를 넘어 어디론가 굉장히 빠르게 달린다. 누군가는 집으로, 누군가는 물건을 옮기러, 누군가는 일터로 정신없이 달리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나는 아주 천천히 오른쪽 발목을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여행의 묘미는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내가 정한 속도를 따라가는 즐거움이 있다.
이제야 도달한 수영강. 밤이 가득한 수영강에 잠시 멈춰 선다. 온갖 소음 속에서 자유한 이 시간. 가을의 밤 속에 뿌려져 있는 별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그리고 동주의 시를 찾아 듣는다. 여행 속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들음의 매력이다. 낯선 언어, 낯선 곳들을 다니다 보면 내 귀에 익숙한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가깝지만 너무 멀게 느껴졌던 일본의 오사카에서도 그랬다. 도톤보리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는 밤이었다.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이국적 풍경이 나를 압도했다. 사방을 돌아봐도 일본어 가득한 간판과 일본의 먹거리 가득한 어색한 냄새, 내가 밟는 아스팔트의 질감조차 어색해지고 부담스러워졌다.
그 순간 내 귀에 이어폰을 꼈다. 그리고 잠시 앉을 곳을 찾아 재빨리 볼륨을 높였다. 번접하고, 어색하고, 이질감까지 느껴졌던 순간, 이문세 씨의 "옛사랑" 들었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대로
내버려 두듯이
흰눈 내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길 찾아가지
광화문거리 희눈에 덮여가고
하얀눈 하늘높이 자꾸 올라가네
- 이문세 옛사랑 중에서 -
갑자기 모든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느껴졌고, 낯선 곳은 익숙한 선율과 언어로 침착해졌다. 고마웠고, 감사했다. 수영강을 걸을 때 나는 종종 익숙한 것을 즐긴다. 그것은 바로 윤동주 시인의 시낭송을 듣는 것. 부산에 와서 친해진 동주의 시. 그의 시는 가을 밤의 수영강 여행에는 필수템이다.
쏜살처럼 달리는 도로에 벗어나 어두운 밤을 달빛과 함께 가득 누리는 수영강은 내게 별 헤는 밤을 추천한다. 그의 시를 조용히 들으며 거닐다 보면 나 역시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사람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그리고 깊어지는 가을밤뿐만 아니라 별을 헤아리고 있는 수영강을 넉넉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내 입을 열어 낭독하는 시를 따라 조금씩 읊조리게 된다. 조심스레 읽어 내려가는 그 시간. 아스라이 멀었던 별이 가까이 다가온다. 스산하던 마음은 별의 침묵을 따라 조용하고 고요해진다. 그리고 수영강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신이 곁에 존재함을 느끼게 해 준다.
가을의 낮보다 아름다운 수영강을 한 참을 걸었는데도, 더 걷고 싶어 나는 조금 더 걷는다.
동주와 별과 함께. 가을밤의 어느 날.